항일련군 제3군 2사 사장 리태의 이야기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8

2020-11-09 08:47:31

상지시 상지진 상지렬사릉원내 주하항일유격대기념비. 리태 관련 이 기념비는 1965년에 세워졌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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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태(李泰,?ㅡ1940)는 일명 송중학(宋仲鹤)이라고도 하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리태를 알리는 자료는 별반 보이지 않으나 필자가 본, 리태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자료는 1933년 10월 주하(珠河)유격대에 참가했다는 자료인 것 같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의 력사를 헤아리면 제3군의 전신은 1933년 10월 10일 설립된 주하항일유격대로 나타난다. 주하항일유격대를 말하고 리태를 말하자면 주하 당조직과 유격대 설립준비과정을 돌이켜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 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주하현 경내에는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초에 이르러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제 원칙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해체되면서 그들은 륙속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인 중공당원 3명으로 중국공산당 주하현 첫 기층지부가 조직된 것은 1930년 8월이고 그해 9월에 이르러 당원이 8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주하현특별지부가 세워졌다.

그해 10월에는 중공주하현위가 조직되였는데 그 거개가 조선사람들이였다. 1931년 12월에 중공주하현위는 주하특별지부로 재조직되면서 조선사람 지희겸이 특별지부서기로 되였다. 지부 조직위원과 선전위원도 조선사람이였다. 1932년 6월에 중공만주성위에서 성위순시원으로 최동범, 즉 리복림을 주하현에 파견하였다. 따라서 주하특별지부는 주하중심현위로 되면서 지희겸을 서기로, 최동범 즉 리복림을 조직부장으로, 리추악을 부녀위원으로, 김책을 군사위원으로 내세웠다.

신생한 중공주하중심현위는 주하현과 린근의 위하, 연수, 방정 등 현의 당사업을 지도하는 한편 항일무장사업 일환으로 주변의 ‘홍창회’를 우리 편으로 쟁취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내밀었다. 때는 1931년 9.18사변후이라 중공중앙에서는 중공만주성위에 병사사업에 중시를 돌리면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리였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앙의 지시정신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9.18사변 후 감옥에서 구출된 료녕성  조양현(朝阳县)사람인 조상지(赵尚志)를 성위 병사위원회(兵委)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2년 6월에 조상지는 성위의 지시를 받고 파언(巴彦)유격대에 파견되였다. 파언유격대는 9.18사변 후 북평에 가서 공부하던 장갑주(张甲洲)등 학생들이 고향에 돌아와 1932년 5월에 조직한 200여명의 항일부대로서 ‘동북로농의용군독립사’로 불리였다. 그해말에는 ‘중국로농홍군 제36군 강북(江北)독립사’로 개편되여 장갑주가 사장으로, 조상지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동북항일련군 장령전》(흑룡강인민출판사, 2009년 10월 출판)에 리태의 짧은 략력이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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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한 이 부대는 당내 ‘좌’경로선의 산물인 ‘북방회의’ 영향을 심히 받은 데다가 지도자들 의견이 다르고 대오가 상당히 복잡한 등 여러가지 원인, 적들의 거듭되는 진공으로 1933년 봄에 이르러 흩어지고 말았다. 파언유격대 실패와 해산으로 조상지는 이른바 우경착오로 지목되여 항변할 권리조차 없이 당적개제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조상지는 실망하지 않고 1933년 3월에 빈현(宾县)에서 활동하는 반일의용군 손조양(孙朝阳)부대에 들어갔고, 점차 손조양의 신임을 얻어 손조양부대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이지만 중공주하중심현위는 조선인을 주체로 조직된 현위이다. 1933년 3월, 주하중심현위는  주신양(朱新阳) 등을 위하(苇河)의 위만군 온퇀(温团)에 파견하여 병사공작을 하게 하였다. 결과 120여명이 기의하고 250여명으로 발전하였다. 주하중심현위에서는 기의부대에 또 리계동(李启东), 김책(金策)등 조선동지들과 일부 동지들을 파견하였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현위에서는 또 리복림(李福林,조선족) , 리태 등을 방현대(访贤队), 서성대(西省队) 등 부대에 파견하여도 성공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어찌하든 지금까지 연구자료로 보는 조선족 리태의 첫 등장이라 하겠다.

1933년 6월 주하중심현위에서는 조선동지들인 리계동, 리근식(李根植), 강희선(姜熙善) 등을 빈현일대에서 활동하는 의용군 손조양부대에 파견하였다. 리계동 등 조선동지들은 뜻밖에도 손조양부대에서 조상지와 원 파언유격대 대원 왕덕전(王德全)을 만났고 함께 대의를 도모하게 되였다. 그러던 이해 10월 4일, 손조양부대에 숨어든 일본특무가 손조양더러 조상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리간을 하여 조상지 등 우리 동지들의 처지는 험악하게 번져갔다.

별수가 없었다. 왕덕전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상지와 리계동, 리근식, 강희선, 왕덕전, 강감용(姜甘用), 김창만(金昌满) 등 7명동지들은 10월 4일 밤에 기관총 한자루와 보총과 권총 등 11자루를 가지고 세패로 나뉘여 손조양부대를 벗어나 밤도와 주하현 륙도하자(六道河子, 오늘의 尚志市三阳乡六棵杨村)에 집결하였다.

이튿날 이들이 주하중심현위와 련락을 가지자 현위에서는 군사교통원 사영진(沙永振)을 보내 맞이하도록 하고 선전을 맡은 주신양(朱新阳)더러 도와나서게 하였다. 현위에서는 또 리태와 리복림, 박오덕(朴吾德), 박삼문(朴三文) 등 조선동지 4명과 성위에서  파견한 왕옥승(王玉升),  리천지(李天池) 등을 파견하여 조상지 등과 합류시키였다. 무장대오는 즉각 13명으로 늘어났다.

리태 관련 주하항일유격대 창립과 투쟁이 《동북항일련군 제3군》(흑룡강인민출판사, 2005년 5월 출판) 책에 소상히 소개되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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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0월 10일, 중공만주성위와 주하중심현위의 지도하에서 당이 직접 지도하는 주하동북항일유격대가 주하현 삼고류(三股流, 오늘의 尚志市三阳乡) 맹가분방원(孟家粉坊院)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유격대는 모두 리태 등 13명으로 대장은 조상지가 맡고 조선족 리복림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이들 13명 중 리태와 리계동, 리근식, 강희선, 김창만, 리복림, 박오덕, 박삼문 등 8명은 확실한 조선족이고 강감용은 알수가 없다. 여러가지 총 13자루와 기관총 한자루가 기본무장으로 되였다.

그후 이들 13명 동지를 기본력량으로 구심점으로 하면서 주하항일유격대는 1937년에 이르러 10개 사, 6000여명 병력을 가진 항일련군 제3군으로, 북만지구 항일무장투쟁의 중심력량의 하나로  발전, 장대하였다. 주하항일유격대가 항일련군 제3군의 전신(前身)이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리태는 제3군의 기초로 되는 주하항일유격대의 시초 13명 대원중의 일원으로 주하항일유격대와 더불어 피어린 북만 항일의 싸움터에서 싸웠다.

1934년 6월 28일, 주하현 류수하자(柳树河子, 오늘의 상지시 乌吉密南沟)에서 주하당과 부대 련석확대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의용군, 산림대를 개편할 데 대한 원칙과 기획을 통과하였다. 이튿날 6월 29일에는 새로 개편된 의용군, 산림대를 망라한 부대장병대회를 가지고 동북반일유격대하동지대(哈东支队)의 정식 설립을 선포하였다. 1935년 1월 28일에 이르러 이 하동지대는 주하현 철도남 반절하(铁道南半截河)에서 조상지를 군장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확대 개편되였다. 리태는 제3군 제1사 제3퇀 대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다가 얼마 후 정식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절 3군은 총병력 500여명으로서 산하에 1개사, 3개퇀을 두었다. 리태가 제3퇀 정치부 주임일 때 제1퇀 정치부 주임은 선후로 리복림이고, 제2퇀 제1임 퇀장은 조선족 리희산(李熙山) 즉 허형식(许亨植), 정치부 주임은 김책이였다. 1935년 하반기에 이 2퇀의 전사들로 제4퇀이 조직되고 2퇀이 새로 조직되였다. 그뒤 항일영웅으로 이름난 조일만(赵一曼)이 신2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2퇀은 조일만 렬사 생전 소속부대로 불리우고 제3퇀 정치부 주임 리태와 불가분리의 인연을 맺었다.

1936년 4월 조일만 소속 제2퇀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2사로 개편되면서 600여명 대오를 이루고 산하에 6개퇀을 두었다. 1936년 8월 1일 리태 소속 제3군은 정식으로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6개 사(후에 10개사로 발전)를 두었다. 조일만은 이해 8월 희생되였지만 제2사는 변함이 없고 3군의 여러 부대들과 더불어 발전의 일로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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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봄 일제놈들과 위만군은 이른바 ‘삼강성대토벌’ 작전부서에 따라 송화강 하류지구에서 활동하는 우리 항일련군 부대들에 대해 전례없는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항일련군 제3군과 6군, 9군, 11군 부대들은 적들의 대거진공에 맞서 싸웠지만 우리 부대의 손실은 갈수록 험악하게 번져갔다. 이에 앞서 제3군 제7사와 제8사가 선후로 반변하여 그 손실이 엄청났고 투쟁을 견지하는 제6사와 9사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1938년 여름과 가을 사이 3군의 상망(伤亡)정도는 부대의 절반을 넘었다.

1938년 6월 중공북만림시성위에서는 통하현(通河县) 경내에서 제8차 상무위원회 회의를 가지고 제3군의 원 10개 사를 4개 사로 축소개편하기로 결의하면서 3군 9사와 2사를 합치여 신편 제2사로 하였다. 리태 소속 신편 제2사는 송화강 남안의 방정(方正), 연수(延寿), 빈현(宾县), 주하(珠河) 일대에서 분산활동하면서 투쟁을 견지하였다.

이해 10월, 2사 정치부 주임 오경재(吴景才)가 방정현 로도묘(方正县老道庙)전투에서 희생되자 리태가 2사 정치부 주임직을 이어받았다. 이어 2사 사장이고 중공북만림시성위 위원인 란지연(兰志渊)이 1939년 1월 사부 부관 한철군(韩铁军) 등 20여명을 살해하고 20명 전사들을 협박하여 방정현에 가서 투항변절(해방 후 신분을 속이고 산동에 숨어 살다가 1958년에 반역자, 한간 죄명으로 총살 당함)하여 버렸다.

2사 정치부 조직과 과장 리홍수가 몸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20명 전사들을 이끌고 소속 부대와 당조직을 찾았고 후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대로 개편되였다. 2사 대리 참모장 곽혁(郭革)은 83명 대오를 이끌고 북만림시성위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의란 부근에서 제5군과 9군부대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행동하게 되였다. 1939년 5월에 이르러 2사는 3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리태는 30여명의 동지들을 지휘하면서 통하의 대고동하(大古洞河), 소고동하(小古洞河), 파란하(巴兰河) 일대에서 적들과 눈물겨운 혈전을 이어갔다.

그해 5월 이후 3군 부대는 성위 제2차 집행위원회(执委) 회의정신에 따라 부대를 다시 정돈하면서 3군 부대를 3개 사로 개편하였다. 리태가 이끄는 30여명 대오와 군부 제1련은 신 제2사로 개편되고 리태가 제2사 사장 겸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새로 조직된 2사는 병력이 7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해 5월 30일,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이 덕도 조양산(德都朝阳山)에서 설립을 선고하였다. 제3로군에는 항일련군 제3군, 6군, 9군, 11군이 망라되는데 리태가 이끄는 3군 2사는 제3로군 소속부대로 되였다.

항일련군 제3군 2사 신임사장 리태는 사의 70여명 동지들을 이끌고 계속 파란하와 대소고동하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의란(依兰), 통하(通河), 목란(木兰), 철력(铁力) 등지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그러던 1940년 봄에 리태는 통하지구에서 반역자에 의해 살해되였다. 우소웅(于绍雄)이 주필을 맡은 《동북항일련군 장령전》의 리태 략력이 그렇게 씌여져있다. 이 장령전은 흑룡강인민출판사에서 2009년 10월에 출판한 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아직 리태의 희생자료를 접하지 못하여 그 상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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