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 (1)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9

2020-11-16 09:15:34

동북항일련군 옛 휘장. (사진자료)

1

1932년 7월-8월 사이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는 항일유격대 골간을 양성하기 위하여 보청현 소성자골(宝清县小城子沟)에다 비밀 군정강습소를 꾸리고 요하(饶河), 무원(抚远), 호림(虎林), 보청(宝清) 등 현의 당조직들에서 추천한 30여명의 청년남녀들을 첫번째 학원으로 받아들이였다. 이들 30여명 학원들중에는 라북(萝北)에서 달려온 소학교 교원 출신의 오옥광도 있었다. 오옥광은 여느 학원들과 더불어 강습소 책임자 최석천과 교원 정문(郑文)에게서 열심히 정치과와 군사과를 배웠다. 최석천은 오옥광을 혁명에로 손잡아준 선배이고 스승이였다.

오옥광(吴玉光, 1909ㅡ193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庆尚北道义城郡安平面) 사람이다. 9살 되던 해 1917년에 어린 오옥광은 온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화전현 대영구(桦甸县大荣沟)로 이사하였다. 부모가 아글타글 뒤바라지한 덕분에 오옥광은 당지 4년제 소학교를 무난히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할빈, 아성(阿城) 등지에 가 중학교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주하현 삼툰(珠河县三屯)에 가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30년을 밑도는 지난 세기 20년대 말기, 그 시절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아성과 주하를 망라한 북만 각지에서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면서 중국공산당 기층조직을 널리 발전시키던 시절이였다. 맑스-레닌주의 선진사상을 받아들인 오옥광은 교원사업을 하는 한편 지하혁명활동에 열성적으로 나서다가 1930년 겨울에 일가족과 함께 다시 라북현으로 옮겼다. 표면으로는 농사를 지었지만 사실은 탕원현에서 활동하는 공산당원 최석천과 손을 잡은 비밀 혁명가였다. 그 후 당조직의 지시로 요하로 활동무대를 옮긴 최석천 선배가 보청 소성자골에다 군정강습소를 꾸리자 만사불구하고 달려온 오옥광이였다.

1932년 10월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는 항일유격대에 앞서 특무대(特务队)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특무대는 최석천, 김문형(金文亨), 김동천(金东天), 최룡석(崔龙锡), 허성재(许成在), 박영근(朴英根) 등 6명이고 특무대를 직접 조직한 황포군관학교 출신 최석천이 대장을 맡아나섰다. 이 특무대는 그 후 신속히 발전하면서 1933년 4월에 요하현 대엽자구(大叶子沟)에서 요하농공(农工)의용군으로 개편되였다.

보청 첫 군사강습소를 졸업한 후 학원들은 각지에 돌아가 자기 지역의 항일유격대 설립에 뛰여들지 않으면 요하의 특무대나 요하농공의용군에 직접 참가하여 맹활동하였다. 오옥광은 라북에 돌아가 혁명활동을 벌리다가 1933년말에 탕원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반장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옥광의 부인 리계란. (사진자료, 1918ㅡ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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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옥광 소속 탕원항일유격대를 보면 1932년 10월 10일에 현안의 반절하(半截河)에서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정식 명칭은 ‘중국로농홍군 제33군 탕원민중반일유격대’였다. 설립될 때의 유격대원들은 40여명인데 모두가 당원이 아니면 공청단원들이고, 대부분이 조선동지들로 구성되였다.

그 후 탕원항일유격대는 투쟁경험이 따르지 못하고 비적의 습격과 토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산림대 등 원인들로 두차례 실패를 거듭하다가 1933년 11월 이후 다시 조직되여 왕성한 활력을 과시했다. 탕원항일유격대 참모장이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인근이다. 리인근(李仁根)은 장인추(张仁秋)로도 통하며 최석천처럼 20년대 후반 북만 탕원에 돌아가 혁명활동을 벌리던 조선족혁명가였다.

탕원항일유격대는 설립된 후 대원들의 년령 정도에 따라 산하에 청년대와 중년대를 두었다. 청년대 대장은 후일 항일련군 제6군 재봉대 대장이고 이름난 항일련군 녀전사인 배성춘(裴成春)의 셋째 남동생 배경천(裴敬天)으로 알려진다. 배성춘과 그의 세 남동생인  배석철(裴锡哲), 배석구(裴锡久), 배경천은 모두가 보청 소성자에 꾸린 군정강습소 학원들로서 오옥광과는 학원동창으로서 서로 믿고 받드는 익숙한 관계였다. 오옥광은 배경천이 대장으로 뛰는 청년대에 소속되였다.

그때 탕원항일유격대 병력은 모두 50여명으로 헤아려진다. 그중 녀대원은 배성춘, 리계란(李桂兰) 등 7명으로서 배성춘 등이 조선족이였고 리계란은 만족이였다. 유격대 반장인 오옥광은 1902년생 배성춘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자기보다 9살이나 어린 1918년생 리계란을 꼬맹이라고 불렀다. 오옥광과 리계란은 둘 다 라북현 출신이라 더구나 허물이 없었다. 유격대는 그야말로 한족, 조선족, 만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혁명의 대가정이였다.

1934년 가을 오옥광 소속 탕원항일유격대(탕원민중반일유격대)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좇아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로 개편되였다. 이해 겨울 일본침략자들은 일본군과 위만군, 탕원경찰대대 등 500여명의 병력을 긁어모아 탕원항일유격대와 유격대 후방기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날뛰였다. 한편 산속으로 이어지는 입산소로길을 전부 봉쇄하면서 탕원유격총대로 이어지는 식량원천을 단절하여나섰다. 하지만 신출귀몰하는 오옥광과 소속 유격총대는 적들과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벌리면서 적들을 근거지 밖으로 몰아냈다.

적들과의 싸움 속에서 탕원유격총대는 날로 장대하여갔다. 1935년 겨울에 이르러 탕원유격총대는 700여명으로 발전하면서 북만 하강지역(下江地区)의 강력한 항일무장대오로 성장하였다. 이해 12월 중순경에 오옥광 소속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개편되였다. 1936년 1월 30일에는 전군 장병 1000여명이 탕원현 온가툰(温家屯)에 집결하여 군기수여식을 가지면서 건군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날의 군기수여식에 참가한 오옥광과 원 탕원항일유격대 전우들은 기쁨에 넘쳐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리계란이 재가한 후 낳은 딸 류영(오른쪽)과 항일련군 로전사 리민(1924ㅡ2018).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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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이 설립되면서 오옥광은 6군 산하 제4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몇달 후 6월에는 원래의 4개 퇀으로부터 7개 퇀으로 늘어나더니 9월에는 6군이 동북항일련군 제6군으로 재편성되면서 오옥광은 제4사 정치부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1936년말에 이르러 항일련군 제6군은 1500여명으로 장대하여졌다. 오옥광의 4사 부대는 모아산에 주요밀영을 잡고 도처에서 적들을 까부시였다. 4사의 밀영은  탕원현 이서(汤原县以西), 의란(依兰)과 이춘(伊春) 변계의 사괴석산 북쪽기슭(四块石山北麓)에 위치하였다. 습관상 모아산(帽儿山)밀영이라고도 한다. 6군은 부대의 겨울철 복장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아산밀영에 6군 재봉대를 설치하였는데 군재봉대 대장 겸 당지부 서기가 오옥광과 동지들이 누님이라고 부르는 배성춘이였다.

재봉대는 조선동지들인 박영선(朴英善), 리민(李敏), 리재덕(李在德), 김백문(金伯文)과 만족녀전사 리계란(李桂兰) 등 10여명 녀전사들로 자못 활기를 띠였다. 4사 부대와 재봉대는 밀영숙영지가 서로 떨어져있었으나 한집안이나 다름이 없었다. 같은 라북 사람인 오옥광과 리계란은 어느덧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1936년 이해 만 12살인 리민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남녀 사이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 리소봉(李小凤)이라 불리운 리민은 늘 같이 지내던 리계란이 보이지 않으니 찾기 시작하였다. 밀영 주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야 리민은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과 리계란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리계란과 말을 건네였다.

“산에서 내려오시네. 뭘 하러 가셨어요?”

“토끼 잡으러 갔지.”

“토끼 잡으러? 그래 잡았어요?”

“달아나서 잡지 못했구나!”

리민과 리계란의 대화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흐른 뒤에야 리민은 자기가 철부지였음을 알았고 오옥광과 리계란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였다.

1937년 2월 2일, 항일련군 6군은 탕원현 격절하(格节河)밀영에서 군정련석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중공북만림시성위 서기 풍중운과 하강특위, 6군의 군과 사, 퇀의 주요지도동지들이 참가하였는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은 이날 회의참가자의 한 사람이였다. 확대회의는 6군 대리 군장 대홍빈(戴洪滨)을 정식 군장으로 결정하고 6군의 중대한 문제들은 군장과 정치부 주임, 참모장으로 형성된 고급회의에서 집단으로 해결했다, 당의 령도를 강화하여야 한다 등 의제로 열리였다.

회의가 결속된 후 6군의 4개 사 지도자들은 자기의 활동구역으로 달려갔다. 오옥광은 군장 겸 4사 사장인 대홍빈과 함께 4사의 4개 퇀을 이끌고 모아산을 중심으로 하는 탕원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모아산밀영에 자리잡은 북만림시성위기관과 군재봉대를 망라한 6군의 후방기지를 보위하는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하였다.


4

어느덧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더니 무더운 여름이 돌아왔다. 이해 1937년 7월에 중공북만림시성위 확대회의가 6군의 모아산재봉대ㅡ피복공장에서 열리였다. 오옥광은 북만림시성위 서기 풍중운(冯仲云), 3군  군장 조상지(赵尚志), 6군 정위 리조린(李兆麟 ), 5군 군장 주보중(周保中),  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 장란생(张兰生), 6군 군장 대홍빈(戴洪滨), 6군 참모장 풍치강(冯治纲), 9군 정치부 주임 허형식(许亨植, 조선족, 항일렬사), 공청단북만성위 서기 황성식(黄成植, 조선족, 항일렬사) 등 동지들과  군대와 지방의 지도일군들과 더불어 그번 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기간에 배성춘과 리계란 등 재봉대의 전체 동지들이 회의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후근복무를 도맡으며 최선을 다하였다.

회의기간에 모아산밀영에서는 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조선족)과 군재봉대 녀전사 리계란(만족), 3군 정치부 선전과 과장 우보합(于保合, 만족)과 군재봉대 녀전사 리재덕(李在德, 조선족) 두쌍의 즐거운 혼례식을 가지였다. 간소하고도 열성에 넘치는 두쌍의 같지 않는 민족의 혼례식에서 혼례식 사회를 맡은 주보중은 이들 두쌍의 결합을 두고 맑스와 옌니(燕妮)의 진지한 사랑에 비유하였다.

혼례식 주례를 맡은 조상지 사령은 그들 두쌍을 보면서 앞으로 혁명의 길에서 서로 관심하고 사랑하고 손잡고 항일하면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하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오옥광과 부대장병들 모두에게 누님, 언니라고 불리우는 배성춘도 6군 재봉대의 리재덕, 리계란이 사랑하는 사람과 맞서니 자기 일처럼 뜨겁게 축복해주었다.

리계란은 오옥광이 탕원항일유격대 시절부터 꼬맹이로 부르며 누이로 대하던 스스럼없는 관계였다. 그런 리계란(1918-2008)은 리아주(李亚洲)라고도 부르며 료녕성 서풍현(西丰县) 태생이였다. 친남매들은 줄레줄레 아홉이고 계란은 장녀라고 하지만 그의 우로 오빠들만 셋이였다. 가난한 살림은 그들 아홉 남매를 먹여살리기도 어려웠다. 리계란은 여덟살이 되자   벌써 어른들 따라 산에 올라 누에를 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28년에 리계란은 열살 나이 소녀였다. 이해 계란은 외삼촌 송전쌍(宋殿双)과 큰오빠 리봉림(李凤林)을 따라 북만의 라북현 압단하구 칠마가(鸭蛋河区七马架)로 이주하였다. 1931년 9.18사변 후 리계란의 어머니와 두 오빠가 항일구국활동에 뛰여드니 큰오빠 리봉림은 중공압단하구위 서기이고 리계란은 1932년에 벌써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압단하구(오늘의 凤翔镇) 부녀구국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우에서 이미 언급하다싶이 1933년 겨울에는 탕원항일유격대 녀대원으로 뛰면서 오옥광과의 사이가 각별히 좋더니 그 사이가 1936년 여름부터 항일전의 사랑으로 활짝 피여났다. 1936년 이른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재봉대 정치주임으로 활동한 6군의 녀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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