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10
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 (2)

2020-11-23 09: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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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오옥광과 리계란의 깨쏟아지는 행복한 시각은 근근히 2일 뿐이였다. 일본침략군과 싸우는 가렬처절한 항일의 싸움터에서 4사부대의 중책을 짊어진 오옥광은 사랑하는 안해 리계란이 6군 재봉대에 남아 있을 때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항일의 피어린 최전방으로 달려가야 하였다. 그 최전방 걸음이 그들 부부 사이 영원한 리별로 이어질 줄이야.

리계란의 딸 류영이 출판한 《동북항일련군 녀병》 연구자료에 따르면 1938년 3월 15일 이른 새벽, 우리 교통원 조홍생(赵洪生)의 변절로 서락진(舒乐镇) 주재 일본수비대 놈들이 6군 4사 재봉대밀영을 포위하였다. 잇달아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리계란은 전우들을 엄호하다가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여 탕원현 일본헌병대로 넘겨지면서 현공서 류치장에 갇히였다.

적들은 서락진 리진장과 변절자 조홍생 등 나부랑이들을 내세워 투항을 권유하기도 하고 혼인을 빙자하여 항일련군 녀전사의 절개를 꺾으려고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악착스런 심문과 고문도 항일을 결의하고 나선 항일련군 녀전사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탕원현 일본헌병대 놈들은 리계란을 다시 할빈 도리(道里)감옥에 이감시키고 이른바 10년 판결을 내리였다.

오옥광은 일제놈들과 싸우는 전방에서 안해의 체포소식을 듣고 비통한 나머지 통곡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고 싶었고 구출하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전방에서 소속부대를 이끌고 적들과 싸우는 항일련군의 장령이였다. 그는 성스런 항일의 싸움터에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일본 관동군은 이른바 위만주국의 식민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1937년 하반년부터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이 집중한 송화강하류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소탕에 나서면서 일본군과 위만군 등 2만 5000여명의 병력을 내몰았다. 1938년 1월과 4월 사이만 해도 위삼강성(伪三江省)의 적들은 299차 출동하고 오옥광 소속 우리 항일련군 6군 등 부대들은 적들과 123차의 전투(중공흑룡강성위 당사사업위원회 편.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 1985년 4월 내부자료로 출판, 제123페지)를 벌리였다. 오옥광 소속 6군 4사부대도 일본침략자들과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전방의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오옥광은 소속 부대를 지휘하며 적들과 싸우다가 어딘가 부상을 당하였지만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전방에서는 더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항일전에 나설 때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경상을 입고는 전방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철같은 결심을 내린 사람이였다. 나중에야 전우들은 자기들 정치부 주임이 부상당한 것을 알았지만 오옥광은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소탈하게 웃어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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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이후 동북의 항일련군투쟁은 가장 준엄한 시기에 들어섰다. 8군 군장 사문동(谢文东)과 9군 군장 리화당(李华堂) 등이 선후로 투항변절하면서 항일련군 8군과 9군은 거의 전군이 무너져 내렸다. 일제놈들이 ‘집단부락’ 정책을 강행하면서 항일련군 부대와 지방군중들간의 련계를 차단한 데서 항일련군 부대장병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탄알이 고갈되여갔다. 극도의 기아충격 속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전투 희생자들보다 더 많은 편이였다.

이처럼 험악한 환경에서 투쟁을 견지하는 오옥광과 그의 소속부대 형편은 어떠했을가, 풍설사괴석(风雪四块石)으로 불리우며 북만 항일련군연구에 조예가 깊은 30926블로거(30926的博客)는 <오옥광의 죽음> (吴 玉 光 之 死)이란 한편의 실기(신랑블로그, 2014.10.12)에서 오옥광의 생전 최후의 활동과 희생을 두고 상세히 적고 있어 오옥광 연구의 크나큰 공백을 메우고 있다.

<오옥광의 죽음> 실기에 따르면 1938년 12월의 어느날 밤중, 사나운 북풍이 대지를 강타하는 속에서 6군 4사 정치부주임 오옥광(吴玉光)은 한패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오늘의 부금시(富锦市) 경내에 자리잡은 완달산 청산로도묘(青山老道庙)에 이르렀다. 산허리에 세워진 청산로도묘는 10여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그마한 절인데 먼저 도착한 6군 2사 사장 진소빈(陈绍宾) 등이 로도묘에 주숙하고 있어 오옥광과 그의 소부대는 바깥에서 우등불을 피우고 숙영하여야 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오옥광 등은 절당의 구들우에 7군의 녀전사 김철(金哲)과 그의 여덟살 아들 남정책(南征策), 7군 강국신(姜国臣) 퇀장과 그의 안해 류숙청(刘淑清), 7군 녀전사 류명옥(柳明玉), 부상병 리패장과 간호원 그리고 50여세에 나는 류씨(刘四爷) 등 7~8명이 모여있고 바닥에는 가로세로 10여명이 비좁게 들어있음을 알았다.

사장이라는 진소빈(陈绍宾, 후에 변절)은 구석진 벽쪽에 두툼한 다북떡쑥(蒿草)을 깔고 누워있었다. 그들중 7군 녀전사 김철은 황포군관학교 출신 최석천과 같이 일찍 탕원현의 오동하 복흥툰(梧桐河福兴屯)에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꾸린 남선생의 안해로서 남편은 희생되고 홀로 여덟살 밖에 안되는 아들애 남정책(南征策)을 데리고 소속부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식사 후 오옥광은 4사의 장퇀장(张团长), 백복후(白福厚)퇀장 등과 함께 절안에 들어와서 2사 사장 등과 함께 회의를 가지였다. 회의에서 오옥광이 먼저 바로 얼마 전 11월 23일,  6군 1사 정치부주임 서광해와 원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이 한차례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경과를 말하였다. 회의는 이어 지금 부대의 이후 행동문제를 토의하였는데 나중에 오옥광이 그의 군정강습소 시절의 선생인 7군 군장 최석천(최용건)을  찾아 련합행동문제를 토의한 다음 돌아와서 다시 부대의 행동방향을 결정짓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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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7군의 강국신(姜国臣) 퇀장과 경위원이 길을 안내하고 오옥광과 장퇀장이 각기 경위원을 동행하고 길을 떠났다. 이들 6명 대오 속에는 7군부대로 돌아가야 할 7군 녀전사 김철과 그의 아들애가 섞이였다.

<오옥광의 죽음> 실기에는 오옥광의 최후도 언급되고 있다. 실기는 오옥광 등이 청산로도묘를 떠나서 며칠이 지난 흐리터분한 오후라면서 오옥광과 그 일행의 최후를 개략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날도 서북풍이 모질게 몰아치는 매서운 날씨인데 며칠전 오옥광을 따라 떠난 강국신 퇀장이 경위원을 데리고 청산로도묘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강퇀장에게 쏠렸지만 강퇀장은 한식경이 지나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뒤늦게야 들은 소식은 오옥광 4사 정치부 주임과 장퇀장, 두 경위원, 김철과 그의 어린 아들애 남정책 6명 모두가 전부 희생되였다는 비분에 찬 소식이다.

강국신 퇀장의 말에 따르면 그들 일행 8명은 먼저 요하현 경내의 원 주둔지  십팔상지(18垧地)를 찾았지만 부대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였다. 그들은 다시 7군의 장병들로부터 7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요하 폭마정자(暴马顶子)밀영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무리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맞띄웠다. 오옥광은 동지들을 이끌어 적들과 생사판가리전투를 벌리였지만 오옥광, 김철 등 6명은 중과부적으로 적들과의 격전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강국신 퇀장과 그의 경위원만이 가까스로 혈로를 헤치고 나왔을 뿐이다.

<오옥광의 죽음> 실기가 보여주는 오옥광의 장렬한 최후, 북만이란 항일의 싸움터에서 적들을 무찌르던 이 항일련군 사급 장령은 사랑하는 안해 리계란을 만나고 싶었고 구출하고도 싶었지만 만남의 시각을 그리였지만 그리도 총총히 떠나갔다. 그때 오옥광은 만 29살 한창 나이, 가혹한 전투환경에서 오옥광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였다.

리계란은 어떠하던가ㅡ

관련자료를 보면 리계란은 비인간적인 적들의 감옥에서 남편이 장렬히 희생된 소식을 들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때 그는 일순이나마 눈앞이 캄캄해났으나 홀홀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앙다물며 조직의 비밀 한마디도 루설하지 않았다. 1944년에 리계란은 6년 남짓한 옥살이에서 풀려났지만 다시 조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탕원현 보안툰(保安屯)으로 갔고,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어머니의 재삼 권고로 금방 상처한 소학교 교원 류신주(刘神州)에게 재가하여야 했다.

1952년에 리계란은 딸 류영(刘颖)을 낳았다. 1986년 5월 15일엔 중국공산당 당적(1932년에 입당)을 회복하고 부시급(副市级) 대우를 받았다. 2008년 1월 8일에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리계란은 림종을 앞두고 사랑하는 딸 류영과 자기가 죽으면 골회를 오옥광의 유체와 같이 당년 그들이 혼례식을 가지였던 밀영자리에 합장하고 기념비 하나 세워달라고 속셈을 터놓았다.

2014년 5월 14일, 오옥광과 리계란이 혼례식을 가지였다는 석모정자(石帽顶子)산 아래 

동방홍림장의 한 산비탈에서 가진 오옥광과 리계란 장중한 합장의식 모습.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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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씨는 조선족 오옥광과 혈연적 관계가 없다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서 항일련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데서 항일련군에 대해 경모의 마음과 진지한 감정, 연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강시 민주건국회(鹤岗市民主建国会) 회원이고 항일전쟁사연구회 리사, 어머니 리계란의 전기 《충성》(忠诚, 2013년 출판)을 쓴 저자이기도 하였다.

드디여 2014년 5월 14일, 이춘시(伊春市)와 대령구위(带岭区委)의 깊은 중시와 배려로 오옥광과 리계란이 혼례식을 가지였다는 석모정자(石帽顶子)산 아래 동방홍림장의 한 산비탈에 기념비를 세우고 장중한 합장의식을 가지였다. 오옥광은 유체마저 찾을 길 없어 리계란의 딸 류영은 오옥광이 항일련군 군정간부학교를 다니였다는 라북현 오동하강반(罗北县梧桐河畔)의 검은 흙을 오옥광의 골회함에 담았다. 오옥광이 희생되여 77년 만에 안해 리계란과 ‘만나’는 숙연한 시각이였다.

오옥광과 리계란 합장의식에서 리계란의 딸 류영(우2)과 리민 녀사(우3), 항일련군 후대 합영사진. (사진자료)


합장의식에는 오옥광과 리계란의 전우이고 항일련군 녀전사, 흑룡강성 정협 원 부주석인 90세 고령의 리민(李敏), 리계란의 딸 류영 등과 이춘시 관련부문 책임동지, 대령구위와 구정부 지도동지, 조상지장군의 조카 조전리(赵战利), 북만림시성위 서기 장란생의 조카 포홍빈(包洪斌), 이름난 항일장령 풍중운의 조카 풍명기(冯明岐) 등 항일련군 후대들, 나라와 흑룡강성 항일투쟁사연구회 여러 전문가, 학자 그리고 신문매체의 기자 도합 40여명이 참가하였다. 합장기념비에는 ‘항일반려 영항수망’(抗日伴侣,永恒守望)이라는 중문 여덟자가 새겨졌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19년 10월 6일, 필자는 위해 석도에서 리계란의 딸 류영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였다. 류영씨는 2017년 4월에 조직된 흑룡강성 동북항일련군력사문화연구회 부비서장이기도 한데 2012년 12월에 80만자에 달하는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 회고록 상하 두책(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을 펴내기도 하고, 2015년 8월에 중문으로 38만자에 달하는 《동북항일련군 녀병》(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을 펴내기도 한 녀작가였다.

《동북항일련군 녀병》을 받아보고서야 필자는 이책에서 124명 동북항일련군 녀병과 녀성항일영웅들 이야기를 다루었음을 알게 되였다. 그중 항일렬사가 66명으로서 그녀들이 희생될 때 나이가 제일 많아야 37세, 제일 년소자는 12세이고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14년간 동북항일무장투쟁사를 다루고있었다. 류영씨는 바로 이런 녀성이였다.

오옥광 작사 노래. 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이 펴낸 항일련군 가곡집에서.


류영씨는 필자에게 자기가 펴낸 리민회고록 상하 두책과 《항일련군 녀병》을 기념으로 넘겨주면서 사인을 남기였다. 그녀는 나보다 두살 선배로서 왕성한 정력으로 항일련군사, 더우기 녀전사들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항일련군의 항일무장력사와 항일련군의 녀전사들을 둘러싸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합작연구와 집필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공동한 연구와 지향은 우리의 마음이 한곬으로 흐르도록 이끌었다. 그 속에서 하루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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