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교포의 지도자 장희천

2020-12-03 23:10:52

“장희천 동지가 우리를 떠난 지도 어언간 30여년이 되였으나 그의 영원히 중화를 사랑하는 정신은 후세들의 투지를 격려하고 있다.” 애국교포 지도자 장희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복건성 천주시 안계현 외사교포사무판공실 퇴직간부 진극진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희천은 불후의 기념비마냥 후세들을 고무, 격려하고 있다.

장희천은 1888년 복건성 하문시에서 태여났고 원적은 천주시 안계현 룡문진이다. 그는 1911년 해외에서 손중산이 령도하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25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했으며 1947년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했다. 1982년 중공중앙의 직접적인 비준을 거쳐 95세의 고령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정식당원으로 되였다. 장희천은 중국의 유명한 애국화교 지도자, 실업가, 교육가와 사회활동가였으며 새 중국 교포사무사업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장희천은 일찍 동맹회에 참가하여 새로 설립된 민국정부를 위해 세번이나 남양으로 내려가 경비를 마련했고 그후 싱가포르에서 실업을 경영하고 교육사업을 벌렸다. 일찍 필리핀, 인도네시아, 향항과 중국대륙 사이를 오가면서 반 장개석 운동과 항일혁명 진보사업에 종사하였고 이로 하여 세번이나 반동당국에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했다.

장희천.

1925년, ‘5.30운동’이 폭발하자 장희천과 부인 여패고는 국민당 복건성당부 집행위원의 신분으로 ‘하문국민 외교후원회’를 조직, 설립하고 파업, 동맹휴학을 발동했으며 국공합작을 적극 추진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렸다. 하문주재 일본령사관은 장희천의 아버지가 일찍 대북에서 상점을 설립했다는 것을 구실로 그들 일본‘속민’이라면서 일본령사관 지하감옥에 감금하여 위협과 회유로 회개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후에 대만으로 압송되여 9개월 남짓이 감금되였다.

그후 여러 면의 구출을 통해 석방되자 장희천은 방법을 강구하여 대륙으로 돌아와 계속 대혁명에 참가했다. 그는 상해 ‘신문보’에 “나는 중국사람이지 일본속민이 아니다!”라는 공개성명을 발표했으며 특별히 ‘장일중’으로 개명하여 자신이 정정당당한 중국인이라는 것을 표명했다.

1937년,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장희천은 향항에서 민대항일구국동지회를 주최하여 난민을 구제하고 자금을 모았으며 해외 진보청년들과 련계하고 소개하여 연안에 가 항일전쟁에 참가하도록 했다. 1938년, 그는 향항에서 복건구국동지회를 주최하여 난민을 구제하고 건광학교, 립화녀중을 창설함과 아울러 대만혁명동맹을 협조하여 잡지를 출판했다. 1942년, 그는 중공중앙 남방국의 배치에 따라 향항에서 광서 계림으로 갔다. 같은 해 중공 남방사업위원회, 광서성사업위원회가 파괴되자 장희천은 화교 신분으로 지하당원을 엄호하면서 투쟁을 견지했고 먼길을 고생스럽게 달려 가 향항의 전부 재산을 아낌없이 처분하여 혁명을 지원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장희천은 향항, 싱가포르에 돌아가 진보적인 영화와 수출입무역을 경영했다. 1947년, 향항에서 민주동맹에 가입했고 동시에 향항상공위원회 위원을 담임하여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을 협조하여 대량의 해외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새중국 설립을 앞두고 장희천은 중공중앙 남방국의 위탁을 받고 싱가포르에 날아가 진가경을 직접 만나 그가 귀국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것을 요청했다.

새 중국이 설립된 후 그는 중국교포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여 하향응, 진가경, 료승지 등과 함께 새 중국 교포사무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그는 교포지역에 심입하여 교포상황을 료해하고 교포들을 위문했으며 귀국화교를 배치하고 교포지역의 생산을 발전시켰으며 교포와 귀국교포들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고 교포단합을 강화하고 중외친선을 촉진하는 등 면에서 대량의 사업을 했다.

1956년, 장희천은 진가경을 협조하여 전국화교련합회 준비 및 설립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진가경이 병환으로 서거한 후 그는 제1기 전국화교련합회 대리주석을 담임했다. 개혁개방 후 그는 90세의 고령에도 제2기 전국화교련합회 주석, 제5기와 제6기 전국정협 부주석을 맡았으며 화교분야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고 화교지역 두가지 문명건설과 화교련합회조직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진정으로 화교를 위해 마음을 쓰고 화교에게 정을 두었으며 화교들의 리익을 도모했다.

1988년, 장희천은 병환으로 북경에서 서거했다. 장희천의 일생은 전기적 색채로 충만되으며 지금까지도 화교계에서 숭고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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