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곡촌 부녀회장 김정숙 (1)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21

2021-02-20 08:36:28

룡정시 덕신향 금곡촌 원 혁명렬사기념비. 2021년 1월 25일 안인학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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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2021년 1월 23일, 생면부지의 안인학씨로부터 위챗 가입 신청을 받았다. 연변일보에 련재중인 룡정시 금곡 촌출신 손원금 항일렬사 전기를 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위챗 가입을 수락했더니 룡정시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주임급아나운서 안인학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그러면서 김정숙 렬사를 아는가고 묻는다. 금곡촌 출신 김정숙 렬사를 그러는가고 문의하니 그렇다고 하면서 김정숙 렬사 가족이 련락을 바란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렬사가족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인학씨 련락으로 1월 25일 오후 3시에 김정숙 렬사 가족과 통화가 이어지면서 기다리던 김정숙 렬사의 유가족 여러분들과 차례로 통화를 가지였다. 지난 세기 80년대 이후 김정숙 렬사 전기 정리와 그 후의 계속되는 연구에서도 만남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유가족분들과의 기꺼운 통화였다. 김정숙 렬사 가족관계가 새롭게 밝혀지는 순간이였다.

김정숙의 맏손녀인 박춘금(1951년생)씨의 소개에 따르면 김정숙과 남편 박봉환 사이에 자식은 아들 박최현(1929ㅡ1996)하나 뿐이나 박최현은 안해 림영숙과의 사이에 자식 8남매를 둔 자식부자였다. 그런 8남매 중 필자와 통화를 가진 이들은 김정숙 렬사 손자, 손녀와 며느리들인 박일룡, 박춘금, 박춘옥, 최금숙 등 분들이니 김정숙 가족관계의 모르던 부분들이 줄줄이 헤아려진다.

이들 박씨 8남매의 친할머니 김정숙(金正淑, 1909ㅡ1932)은 전주 김씨로서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시골 태생이다. 그 이듬해 일본제국주의가 강압수단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삼켜버리자 조선사람들의 처지는 말이 아니였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왔다. 1910년 김정숙의 일가도 이 대렬에 끼이였다. 그렇게 자리잡은 곳이 화룡현 덕신사 금곡 부근의 어느 마을이였다. 박춘금 등 유가족들도 어느 마을인지 모르고 있었다.

김정숙 일가의 이주 후 생활도 지긋지긋하기만 하였다. 철모르는 정숙이는 너무도 배고파 내내 울음으로 보냈다니 그 가족형편을 알 것 같다. 10대에 잡아드니 눈물도 말라버렸다. 이는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박봉환에게서 들은 내용이라고 한다. 나어린 소녀 김정숙에게도 이 세상은 고르지 못하다는 빈부의식이 싹터갔다.

가난 속에서 김정숙은 10대 중반의 소녀로 자라났다. 15살경에 언덕너머 쇠골마을ㅡ금곡에서 청혼이 들었다. 때는 남녀 15살쯤이면 의례 시집, 장가를 가야 하던 시절이라 김정숙의 부모는 벌써 딸의 혼사를 은근히 근심하고 있었다. 박봉환이라고 하는 청혼자를 보니 나이 든 사람이라지만 어리무던하고 믿음이 갔다.

박봉환은 30 고개를 눈앞에 둔 늙은 총각이였다. 박춘금씨 소개에 할아버지 박봉환이 1976년에 80세였다니 1897년생으로 알려진다. 김정숙과는 12살 정도의 차이를 가진다. 내실을 들춰도 남의 집살이를 하는 순박한 총각이였다. 지금에 와서 고향이 금곡인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어도 할아버지 박봉환은 금곡촌 박씨 가문의 4남1녀중 셋째임은 잘 알고 있은 유가족들이다.

김정숙 렬사의 남편 박봉환. (1897ㅡ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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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원쑤여서 내내 장가를 들지 못하고 20대 후반이 되였다는 박봉환씨.

(에라, 나이 10여살 터울이면 뭐라나, 딸애만 이뻐하면 되는 거지.)

김정숙의 부모가 금곡 박봉환과의 혼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니 정숙이도 별다른 눈치가 없었다. 찌들 대로 찌든 가난살림에 김정숙은 이것저것 고려할 념두도 가지지 못하였다.

1925년경에 김정숙은 시집의 문턱을 넘어섰다. 시집은 쇠골이라 불리우는 금곡 중촌에 자리잡았다. 가난 속에서도 나어린 소녀 김정숙은 남편을 받들어 그들 부부는 서로 의가 맞아 치륜처럼 잘 돌아갔다.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10여살 차이에 어떨가 수군수군하더니 종당에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박봉환 그 사람이 녀편네 복이 터졌다는 마을 사람들의 평판이였다. 문제는 후에 생기였다.

금곡과 주변에는 연길, 룡정, 길림 등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20년대 후기에 이르러 이들이 금곡의 상촌(개척), 중촌(쇠골), 하촌(솔밭장) 등 여러 마을에 드나들더니 마을마다에 야학실이 세워졌다. 룡정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의란구에 가 교편을 잡으며 활동하는 금곡 출신의 채수항이 경성감옥에서 풀려나온 혁명자 장창환(항일렬사)을 야학실의 교원으로 보내오고 길림에 가 공부하던 이 마을 김익춘(김경욱, 항일렬사)도 지방에 돌아와 반일사상 고취에 열을 올리였다.

김정숙은 야학실 열성분자였다. 그런데 남편 되는 사람은 정반대로 나섰다. 봉건에 물젖은 남편은 남녀가 모여서 구구하는 것이 딱 질색이였다. 금슬이 좋던 그들 부부의 첫 충돌이였다. 그러건 말건 정숙이는 부지런히 야학실에 다니면서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장창환, 김익춘 등 선생들의 주위엔 한패의 열혈청년들이 똘똘 뭉치였다. 농민협회, 청년회, 부녀회 등 혁명조직들이 잇달아 조직되였다. 당시 부녀회 책임자는 장창환 선생의 안해 리씨였다. 리씨는 조직의 위탁을 받고 공부 잘하고 총명한 김정숙과 선참으로 손을 잡았다. 김정숙은 부녀회의 첫패 회원으로 되였다.

이는 남편 박봉환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박봉환은 혁명인지 뭔지 알바는 없지만 고생을 사서 할건 뭔가며 극구 반대해나섰다. 집안살림이나 오붓하게 잘 꾸려보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였다. 김정숙이 입이 닳게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한바탕 다투고말았다. 이것이 그들 부부의 두번째 충돌이였다.

하나 박봉환은 필경 남편이였다. 서로 감정도 통하는 사람이였다. 다만 아직 혁명을 리해하지 못하고 녀자가 바깥으로 도는 것을 아니꼽게 볼 뿐이였다. 시간이 흐르면 리해하겠지 하고 김정숙은 남편을 눌러앉히고 부녀회활동에 발벗고 나섰다.박봉환은 사랑하는 젊은 안해의 손발을 더는 잡아끌지 않았다.

1930년 여름, 외지에 갔던 채수항이 금곡마을에 돌아와 금곡촌의 제1임 당지부 서기 책임을 짊어졌다. 그와 동지들의 영향하에 혁명의 길에 나선 김정숙은 손원금(항일렬사), 양철운(항일렬사), 장원(항일렬사) 등과 함께 첫패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금곡촌부녀회 회장 책임을 맡아나섰다.

김정숙 렬사의 유가족 모임. 2021년 1월 25일 안인학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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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김정숙이 야학실에 가 강연을 하였다. 부녀들 가운데서 첫손으로 꼽히는 김정숙이 강연한다니 숱한 녀인들이 모이였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한 뿌리에 얽힌 자매들입니다. 우리가 왜 종일 아글타글해도 지긋지긋한 생활을 해야만 합니까? 모두가 일본제국주의와 지주, 자본가들 때문입니다. 이자들을 깨끗이 몰아내고 뚜드려 없애지 않고서는 우리는 한시도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녀인들도 사람입니다. 우리 녀인들이 일떠나자면 먼저 가정이란 이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김정숙의 강연은 부녀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정숙이는 또한 글도 잘 쓰고 혁명가요도 곧잘 불렀다. 그가 앞장서면서 부녀들에게 적기가, 부녀해방가 등 혁명가요들을 배워주니 야학실은 글소리 랑랑하고 노래소리 자주 들리였다. 야학실에 다니는 부녀들이 훨씬 늘어났다. 김정숙은 그들 가운데서 한패의 부녀회원을 발전시키고 그들을 보초, 통신, 밥 짓기, 삐라살포 등 임무 수행에로 이끌었다. 금곡촌은 마을마다 부글부글 끓었다. 혁명의 승리가 금시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금곡일대의 녀인들은 혁명투쟁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931년 가을 전 연변을 들썽한 군중적 추수투쟁이 일어나자 김정숙은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돌아쳤다. 그는 부녀회원들을 수백명 폭동대렬의 전렬에 내세우고 악패지주 최가, 관가의 집으로 몰켜갔다. 지주들의 낟가리를 헤쳐 분배할 때 주저하는 소작인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럴 때면 김정숙은 부녀회 골간들을 이끌고 어김없이 그런 장소에 나타났다.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시름을 놓고 가져가세요. 뒤는 우리가 다 막아줍니다.”

김정숙의 뜨거운 호소는 사람들 마음을 파고들었다. 금곡, 장동, 영동, 우동 네곳의 군중들은 호호탕탕한 대렬을 이루었다. 김정숙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금곡의 녀인들이 대렬의 주체를 이루며 나아갔다. 그 기세는 성난 파도를 방불케 하였다.

대구ㅡ달라자의 추수투쟁은 성과적이였다. 소작인들은 소작료 ‘4.6’의 원칙 대로 자기 몫을 나누어가졌다.이 추수투쟁에서 김정숙과 그가 지도한 부녀들의 역할이 컸다. 사람들은 정숙은 여간내기가 아니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숙 손자, 손녀 분들과의 통화에 따르면 할머니 김정숙은 키가 크지 않지만 아담지고 여무지게 생긴 녀인이라고 한다. 평소 자주치마를 즐겨 입었기에 김정숙의 별호는 ‘자주치마’로 굳어졌다. 금곡촌을 드나드는 지하교통원들이나 외지 혁명자들은 김정숙이라 하면 잘 모르다가도 자주치마라고 하면 잘 안다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남편 박봉환도 그러하였다. 김정숙이 혁명활동을 시작하던 처음에는 바깥활동에 나서는 안해를 반대하던 남편이였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안해가 시름을 놓고 혁명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하고저 그는 어린 아들애 돌보기, 때시걱 등을 손수 맡아 보는 한편 혁명자들 후원 사업에도 발벗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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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가을부터 화룡현 각지에서는 1930년의 지방유격대에 이어 항일유격대가 륙속 조직되였다. 현 안의 달라자구에도 간칭하여 대구로 불리우는 대구유격대가 금곡일대에서 조직되였다. 금곡마을의 동북방 10리쯤 되는 사수평 아래 수리바위 재등에 원 금곡촌당지부 서기 손원금과 박영순을 선두로 하는 대구유격대 직속 병기공장도 꾸려졌다.

김정숙과 그가 지도하는 부녀회는 대구유격대와 병기공장의 든든한 뒤심으로 나섰다. 김정숙은 부녀골간들을 사수평 수리바위 재등에 보내여 밥 짓기에 나서게 하는 한편 그들의 옷을 씻어주고 기워주게 하였다. 어느 날 김정숙은 몇몇 부녀회 골간들과 함께 직접 쌀주머니를 이고 산속 병기공장을 찾았다. 손원금은 부녀회원들이 이같이 헌신적으로 받들어주니 힘이 난다면서 기뻐마지 않았다.

김정숙의 역할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부녀회원들을 조직하여 식량과 옷 등을 모아 유격대에 가져가는 것도, 놋그릇 등을 거두어 산속의 유격대 병기공장에 보내는 일도 그의 사업범위였다. 그는 유격대에 리로운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니 그와 동지들의 노력으로 금곡 여러 마을의 혁명자들 집들에는 때시걱 그릇들인 놋그릇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덧 1931년이 지나가고 1932년이 밝아왔다. 새해 1932년초의 어느 날 저녁 병기공장 책임자 손원금이 병기공장 물자구입차 금곡마을에 내려왔다가 사촌네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헌데 웬걸, 적들이 잠간 새에 사촌네 집 문가에 나타났다. 다행히 경각성 높은 손원금이 가짜작탄 심지에 불을 달며 적들을 제압했기에 포위를 헤칠 수가 있었다.

뒤미처 이 소식을 접한 김정숙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손원금이 적들의 돌연 포위 속에 든 일이 부녀회장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실제 표현이라면서 심한 자책감에 휘말려들었다. 손원금은 자기의 소홀함 때문에 생겨난 일이지 부녀회장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지만 김정숙은 그게 아니였다. 그 후부터 그는 순간의 실수가 큰일을 저지른다면서 매사를 책임적으로 대하였다.

그 뒤 사수평 수리바위의 병기공장은 마을 동남쪽으로 15리가량 떨어진 알미대 산속으로 전이하였다. 한데서 금곡마을과의 거리는 보다 멀어졌지만 김정숙은 병기공장의 후원사업에 보다 발벗고 나섰다. 병기공장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엔 김정숙이 있었다. 금곡촌 부녀회장 김정숙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부녀회 사업은 금곡의 여러 마을들에, 여러 마을의 녀인들마다에 이어졌다. 1932년 봄에 생겨난 일도 그러하였다. 금곡에는 장천익이라는 사람이 14살밖에 안되는 자기의 사촌 동생 장탄실을 10여살 우의 남자에게 시집보내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도 녀자가 동의하지 않는 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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