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전쟁에 뛰여들다 5

2021-06-15 08: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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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분교 인명록은 황포군관학교 제5기와 제6기, 제7기 인원들을 널리 밝히는데 제6기생(1926.10)들 가운데는 녀성대가 있고 녀성대 인원소개에 리추악이 네번째 사람으로 밝혀져있다. 략력에는 ‘리추악 1901—1936 조선 평안남도 공산당 중공철북(鉄北) 구위 서기’로 소개되여있다. 략력은 또 리추악을 양림의 안해(杨林妻子)라고 특별히 밝히고 있다.

리추악이 무한의 녀성대 대원이라는 것은 이들 부부가 광주에서 북벌에 참가했다는 말이 되고 북벌의 고조 속에서 무한에 이르렀고 다시 남창봉기에 참가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달리 증명하는 자료가 계속하여 황포군관학교 관련 자료들과 무한분교 녀성대 관련 자료들에서 나타난다.

양림의 부인이고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녀성대 대원이던 리추악.

남녘땅 광주 시절  황포군관학교는 륙군지휘학교로서 녀병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6년 10월 북벌군이 승승장구로 무한을 공략한 후에는 광주의 국민혁명정부가 무한으로 진출함에 따라 사정이 달라졌다. 국민혁명정부는 북벌전쟁 현실과 민의에 따라 무한에 황포군관학교의 계속인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첫패의 녀성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1927년 2월 12일,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가 량호서원(两湖书院)에서 성대한 개학식(1927년 3월 22일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명되였다.)을 가질 때 200여명의 녀성대 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짙은 회색(深灰色) 군복차림에 산뜻한 군모, 허리띠를 두르고 바지 끝자락을 각반으로 가뜬하게 동이니 군인의 풍모가 그대로 풍겼다.

그들 녀성대 학생들은 중국 력사상의 화목란(花木兰)이나 목계영(穆桂英)에 이어 또 한번 녀자종군(从军)의 전기를 써내려갔으니 중국 제1대 정규녀병의 모습이 중국사람들에게 현란하게 펼쳐졌다. 리추악은 그들 제1대 정규녀병 가운데의 한 조선녀성이였다.

녀성대는 한개 대대로 이루어졌다. 대대 산하에 3개 중대, 9개 구대(区队)를 두고 구대 아래에 3개 반을 두었다. 전체 녀성대는 녀성대를 조직하면서 시험을 쳐서 모집한 183명과 남호학병퇀(南湖学兵团)에서 온 30명 학생까지 213명으로 헤아려졌다. 그들은 황포군관학교 사상 유일한 한패의 녀병들이고 중국의 첫 녀병대이며 중국 현대의 제1대 녀군관들이였다.

무한분교 녀성대는 분교본부가 들어선 량호서원의 동쪽켠의 한 2층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드나드는 단독 대문을 가지고 단독 교실, 단독 식당, 단독 훈련장을 가지며 녀인세계를 이루었는데 아침 5시 반 기상-저녁 9시 반 취침까지 8시간 강의로 긴장히 보내며 휴식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주요과목은 군사와 정치로서 군사과는 주로 보병조전(步兵操典)과 사격훈련 등이였다.

군사훈련과는 말 그대로 어려움의 계속이여서 일부 나어린 녀학생들은 눈물을 보이기가 십상이였다. 정치과는 공산당원 운대영(恽代英) 등의 지도로 맑스-레닌주의 기초리론교육에 자못 중시를 돌리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사, 사회발전사, 부녀해방운동, 공산당선언, 정치경제학, 세계부녀운동사, 삼민주의, 건국방략 등 정치과목을 개설하여 참신한 녀성정치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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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긴장한  군인생활 속에서도 녀성대 학생들은 녀성 특유의 활발함과 명랑함을 잊지 않았으니 여기에 이런 자료가 있다. 그 시절 무한분교 정치과에 후날의 저명한 시인인 산동청년 장극가(臧克家)가 입학하였다. 후에 장극가의 딸이 아버지 소속 무한분교의 생활을 보는 듯이 실감 있게 그려내여 녀성대 리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이 매번 훈련할 때면 200명 녀병이 담장 저쪽에 있고 1000여명 남병이 담장 이쪽에 있게 된다. 이쪽에서 <국제가>를 부르면 저쪽에서는 <소년선봉대 대가>를 부르는데 물결치는 듯한 노래소리와 기분은 대단히 뜨거웠다. 어떤 때는 1200명 신병이 함께 큰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는데 이쪽은 남자들이고 저쪽은 녀자들이다. 나의 아버지는 회색 군복의 남자들과 녀자들이 두쪽에서 서로 노래시합을 벌리였는데 그때의 기분은 아주 뜨겁고 활약적이였다고 말씀하셨다.”

긴장하면서도 신나는 무한분교 생활모습, 그 기분 속에서 녀성대 녀성들의 한 선줄군 리추악의 활동상을 상기하여본다. 그만큼 무한분교 녀성대는 나라 안을 넘어 나라 밖으로, 멀리 쏘련의 모스크바까지 전해졌다. 쏘련의 지도자 쓰딸린은 녀성대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황포군관학교 전체 녀병들이 3.8부녀절 전에 집단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렇게 되여 녀성대 전체의 사진이 찍혀졌으니 중국혁명사에서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무한분교 정치부에서는 인차 행동하여 무창 현진루(显真楼)의 전문 사진사를 청하여 무창 본교의 동쪽가에서 녀성대 집단사진을 찍었다. 녀성대사진과 더불어 무한분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찍은 집단사진들이 황포군교넷에 여러장 나타나는데 이 사진들마다 ‘중국황포군교넷’ 중문과 영어 글씨가 박혀있어 그 출처를 잘 알리고있다.

녀성대 집단사진을 찍은 날이 1927년 3월 5일로 나타난다. 녀성대 집단사진에는 밑부분에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 입학생(入伍生)총대 녀성대대 전체 촬영’이라고 씌여있다. 이 사진은 즉각 쓰딸린에게 전해져 쓰딸린 사무상 우에 놓여졌다고 한다. 그 속에는 우리 겨레인 양림의 안해 리추악도 섞여있었다.

하지만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녀성대는 1927년 2월 12일에 개학식을 가지였지만 장개석의 4.12 상해 반혁명정변과 왕정위의 7.15 무한 공개적인 배반으로 그해 7월 중순에 페교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녀성대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으니 녀성대가 걸어온 발자취는 5개월을 더 이어가지 못하였다.

무한에서 탄생한 무한분교 녀성대의 비극적인 운명이지만 그들중에는 이름난 홍군 녀장령들과 혁명선렬들, 항일영웅들이 수두룩하였다. 사람들, 더우기 동북사람들이 보다 익숙한 항일영웅 조일만(赵一曼, 1905-1936)이 그러하다. 사천 의빈(宜宾)사람인 조일만은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녀성대가 설립되면서 입학한 녀성으로서 리추악과 녀성대 동기동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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