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연의 길

2021-06-15 08:59:12

‘서전서숙’의 옛터는 바로 룡정시 문화로 91번지에 위치한 룡정시실험소학교이다. 학교 정원에 들어서면 운동장 동쪽 가녘에 소소리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보이고 나무 아래에는 ‘서전서숙 기념나무’라는 현판 하나가 세워져있다. 현판에 새겨진 내용은 이러하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 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 학교교육에로 첫걸음을 떼였는데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 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 있다.”

비술나무 곁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건립한 기념표지석이 있다. 석비에는 한자와 조선문으로 ‘서전서숙(瑞甸书塾) 옛터’란 글자가 음각되여있다. 석비 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석비를 두어 서전서숙 옛터 비문을 담았다.

1906년 갓 설립된 서전서숙의 모습.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 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 3.13기념사업회’


또 그 한켠에는 ‘쏘련홍군 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와 더불어 ‘리상설 정(李相卨亭)’도 세워져있다.

연변력사학회와 룡정 3.13기념사업회가 2007년에 펴낸 서전서숙 100돐기념문집 《력사의 종소리》를 펼치면 당년의 서전서숙의 원 모습이 찍힌 색바랜 사진 한장을 볼 수 있다.

정갈한 초가 앞마당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당의 울바자기둥에 ‘서전서숙(瑞甸书塾)’이라고 새긴 현판이 또렷이 걸려있는 사진이다.

1906년 반일민족지사인 리상설은 자기 재산을 털어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开塾)하였다.

서전서숙 옛터 표지석.

이해 초여름, 리상설, 리동녕, 려준, 장유순, 유완무 등 민족독립의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 곳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정했다. 룡정은 조선족들이 집결된 곳으로 북으로는 로씨야와 가까이 있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편리했고 조선과는 두만강 하나를 사이두고 있어 조선과 래왕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였다.

이들은 룡정기독교 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집을 매입하고 ‘서전서숙’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때는 1906년 10월경이였다.

초대 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운영을 맡았는데 맨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 조선인들도 신교육에 대한 리해가 없었으므로 교직원들이 떨쳐나서 조선인마을을 돌아다니며 입학을 권유했으며 멀리 두만강을 건너 회령, 종성, 온성 등지에까지 나가 입학권유를 하였다.

명동학교의 창시자이자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교장도 이에 동조하여 한문을 배우던 자기의 제자 2명을 서전서숙에 보내기도 했다.

‘서전서숙’의 건평은 70평방메터 가량 되였고 교원의 월급이거나 교재, 학생들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리상설의 자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서전서숙은 모든 수업에서 반일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이러한 반일의식은 서전서숙 교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불함산이 높이 있고

두만강이 둘렀는데

서전서숙 창립하니

총준재자(聪俊才子) 운집이라

인일기백(人一已百) 공부하니

구국안민(救国安民)하여보세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발행한 《간도사정》이라는 책은 당시 상인으로 가장한 일본 밀탐이 서전서숙에 들렀다가 랭대를 받은 일화를 적고 있다.

“당시 일제 통감부는 한국 정부와 협동하여 간도조선인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륙군중좌 사이또와 사무관 등을 파견,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상황을 조사케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무자(主务者)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리상설은 산보를 하려고 문을 나서려 하다가 이자들의 내의를 묻게 하였는데 일행은 상업관찰 도중에 들렸다 하고 때는 점심시간이였으므로 지니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온수와 식기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 수 없다 하여 랭랭히 이를 거절하고 리상설의 경우는 일언반구의 질문도 없이 출타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강변에 가 강물로 목을 추겨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 알 수 있는 일이다.”


1907년 4월,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가하라는 고종의 밀사지령을 받고 리상설은 룡정을 떠나게 되였다. 떠나면서 리상설은 려준에게 서전서숙 숙장의 중임을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그해 8월, 일본의 통감부간도파출소가 룡정에 세워졌다. 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 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지어는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구슬리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은 오연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련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으로 1907년 9월경 페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에 이르렀다. 탑도구는 훈춘현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110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 후 3개 반 74명을 졸업시켰다.

조선족 첫 근대교육기관이였던 서전서숙은 그 후에도 세월의 영욕을 같이하며 100여년의 로정을 걸어왔다.

학교는 ‘상전벽해’의 력사의 변천과 더불어 16차나 이름을 바꾸어 오늘의 룡정실험소학교로 되였다.

지난 백여년간 룡정실험소학교는 모두 29기 교장이 력임하여 총 4만여명 학생을 졸업시켰다. 그 가운데는 항일에 뛰여들어 렬사가 된 이들도 있고 고위급 군관이 된 이들도 있으며 과학기술연구 등 첨단 분야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분도 있다. 국내외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교육 등 분야에서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룡정촌 앞자락에 무연하게 펼쳐져있는 서전벌의 이름을 따서 세운 이 서숙은 중국조선족 교육의 첫시작을 열어놓았다.

서전서숙은 일제의 탄압, 감시와 재정난으로 하여 비록 짧은 력사로 끝났지만 그 위상은 조선족 근대교육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전서숙의 설립은 조선족 근대문명교육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연변지역 반일운동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시켰으며 조선족사회의 형성에 막대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서전서숙을 압살하고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서전서숙 자리에 간도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부침 속에 한광우는 1914년경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숙이 비록 일제의 경영으로 전락되였으나 그 전신이 반일지사들의 웅지로 시작되였던 학당임을 한광우는 자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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