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봉기 조선인 희생자 200여명 (4)

2021-08-16 0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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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인민혈의정내 엽검영동지 제사.

40년 전 1981년 연변대학 재학시절에 그 시절 조선족문학사 강사 리정문 선생한테서 1927년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1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이야기를 듣고 설레이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은 자꾸 광주로 달려간다.

기회는 종내 오고야 말았다. 1983년 5월말, 개자귀나무꽃이 붉게 피는 계절에 남녘땅 광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였는데 처음 광주에 가는 사람들치고 양성(羊城)이라 이름높은 광주시 전경을 눈아래 굽어볼 수 있는 월수(越秀) 공원을 돌아보지 않으면 유감이라 한다지만 나는 선참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다.

그날은 해맑은 6월 1일이였다. 중국출국상품교역회를 벗어난 광주시내 1호전차는 동으로, 동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는 사시절 봄과 같은 아열대풍경이 안겨들고 남녘땅에 특유한 오동나무 가로수들이 줄달음쳐왔다가는 소리없이 뒤로 물러섰다. 1호 전차는 어느덧 중산기념당, 광주농민운동강습소를 지나 광주봉기렬사릉원 앞에 멈춰섰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3년 여름이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은 당년에 봉기전사들이 피흘리며 싸웠던 시안의 홍화강(红花岗)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4년에 벌써 수건된 이 렬사릉원은 릉원과 원림 두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전체 릉원면적은 26헥타르에 달했다.

렬사릉원 밖은 그 세월 연변에서는 흔치 않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고 릉원정문 량쪽은 짙은 민족풍격을 띤 정자지붕형 대형기둥벽으로서 대형기둥벽에는 주은래의 친필로 된 ‘광주봉기렬사릉원’이란 금빛글발이 새겨졌다. 대문에 들어서면 휘넓은 광장이다.

광장량켠에는 뭇꽃들이 다투어피는 20개의 큰 화단들이 펼쳐지고 측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중충하여 한결 장중하고 숙연한 감을 안겨준다.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푸른 송백속에 모셔진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렬사묘는 옛 황릉들처럼 거대한 하나의 웅위한 묘인데 렬사묘를 둘러싼 콩크리트담장 정면에는 ‘광주봉기렬사지묘’라고 쓴 주덕 동지의 친필제사(题词)가 숙연히 안겨든다.

렬사릉원 안내자의 소개에 따르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용사들이 많고 한곳에 쌓여있어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덤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렬사묘에는 조선족렬사들도 적지 않게 묻히였다고 동을 달았다.

“…”

나는 일순 할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에서 머리 숙여 묵도하고는 숙연한 기분으로 렬사묘 둘레를 천천히 거닐었다. 높은 콩크리트담장에 둘러싸인 기둥체 꼭대기마다에는 앞발을 척 뻗친 40마리 돌사자가 올려져있었는데 렬사묘를 옹위한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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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사묘를 내려 고색이 짙은 울창한 푸른 송백속을 지나면 넓은 호수속에 2층의 정자지붕으로 된 호수 정자가 나타난다. 호수에서는 천진란만한 아이들과 어린이들이 마침 6.1절이라 명절배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저 아이들은 얼마나 복 많은 세대들인가 하는 생각이 북받쳤다. 그 시각 저 아이들이 저 렬사묘에 잠든 용사들 중에 우리 조선족의 전사들도 섞이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갈마들어 나 스스로도 피씩 웃고말았다.

유람지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꽃밭 속에 잠겨있는 ‘중조인민혈의정’이 시선을 잡는다. 중조인민혈의정은 장방형모양의 2층 정자형으로 되였는데 혈의정 복판에는 거대한 대리석비석이 모셔지고 비석정문에는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업검영 동지의 금빛 제사가 새겨져있다.

대리석 비석 뒤면의 비문은 이런 글로 엮어졌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 로동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기세드높은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들 가운데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중국전우들과 더불어 의기(义旗)를 높이들고 어깨겯고 싸우며 나중에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 영용히 희생되면서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표현하였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 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나는 중조인민혈의정을 천천히 거닐다가도 가까이 ‘중쏘인민혈의정’에도 가보고 민족풍격이 짙은 혈의정 뒤 정자군체의 유람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당기는 것은 중조인민혈의정 정자도안으로 된 진달래도안이였다. 진달래도안은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친선을 상징하고 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못 깊었다.

중조인민혈의정에로 다시 돌아오면 혈의정 중심정자 량켠엔 각기 ‘L’자형의 길다란 랑하와 정자가 있어 휴식의 한때를 보낼 수 있다. 혈의정앞 작은 인공못에는 갓 피여난 소담한 연분홍 련꽃송이가 물에 동동 떠있고 분수는 반공중에 새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인공못에 이채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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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잊지 못할 광주봉기렬사 릉원이였다. 허나 대학을 마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서는 위대한 광주봉기와 조선족전사들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자료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렬사묘 아래에 자리잡은 광동성혁명렬사박물관을 찾아 해당 연구일군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박물관의 일군들은 내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왔고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당신들 조선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중년을 잡은 한 녀성연구일군은 중조인민혈의정 대리석비석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중 거의가 희생되였다고 씌여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면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녀성은 나를 박물관내 한 진렬대로 안내하였다. 진렬대 유리 안에는 한 조선족전사가 사용했다는 맥심기관총이 진렬되여 있었는데 이름도 모를 그 전사는 광주쏘베트정부와 총지휘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이 맥심기관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쓰러눕히였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의 나젊은 생명을 바쳤단다.

이야기 도중 중년녀성이 특히 마지막까지 사하를 지켜서고 철거를 엄호한 것은 조선사람들로서 광주봉기연구에서 조선족은 주요한 연구대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눈굽이 찡 젖어들었다.

렬사릉원은 진정 아름다운 유람지로, 행복의 락원으로 꾸려졌다.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치는 6.1절 호수가에는 붉은넥타이들이 환락에 들끓고 있었고 어린이들을 태운 배들은 잔파도 일으키며 앞으로 미끄럼치고 있지 않는가.

그날 어떻게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발길을 떨어지고 어떻게 렬사릉원 정문을 나섰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머리속에 온통 광주봉기 아니면 조선족전사들이였으니…

그때로부터 조선족연구의 한 주요과제는 북벌전쟁과 광주봉기로서 관련 론문이나 소개글들을 해당 학보나 조선문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에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널리 알려왔다. 2006년 이후 10년간 절강월수대 시절에는 선후 세차례 광주로 다녀오며 광주봉기와 조선인 연구에 깊이깊이 빠지였다.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이 렬사릉원을 처음 다녀온지도 어언 40년이 지났다. 40년 세월 속에 세차례 더 광주행에 올랐다지만 마음은 늘 광주봉기렬사릉원 옛터로 달려간다. 그러면 광주봉기 우리 민족 전사들과 맘속대화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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