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5.30폭동의 주요지도자 김철 (2)

2021-08-30 08: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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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2월에 국제공산당에서는 결의(‘12월 테제’를 지어 여러 개 파벌로 된 조선공산당을 해산시키고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 재건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못한 상황에서 국제공산당에서는 해당 인원을 상해에 파견하여 중공중앙과 상의하게 하였다. 1930년 1월, 중공중앙 위원이며 중화총공회 상무위원인 소문(苏文)이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한무(조선인, 모스크바 공산대학 졸업생), 리춘산(중국인, 모스크바공산대학 졸업생)과 함께 할빈에 가서 중공만주성위 및 조공당 각파 만주총국의 간부들이 참가한 련석회의를 가지고 조공당 당원들을 중공당에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련석회의 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공산당원 왕경(조선족)을 연변에 파견하여 파괴된 연변 당조직을 복구, 춰세우게 한 뒤 4월 초순에 또 공산당원 박윤서(1930년 3월 남만에서 입당)를 중공만주성위 특파원으로 연변에 파견하였다. 4월 초순의 룡정, 박윤서의 소개로 중국공산당 가입을 견결히 주장한 김철, 강학제, 소성규 등 동지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4월, 김철은 박윤서를 안내하여 삼개사 자동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일찍 어깨곁고 싸웠던 장자관, 정룡수 등 몇 사람을 당조직에 받아들이고 장자관을 당소조장으로 하는 개산툰의 첫 중공당조직을 설립하였다. 이달(1930년 4월)에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는 붉은 5월 투쟁을 발동하여 투쟁의 시련을 겪은 원 조공당당원들을 중공당조직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4월 24일, 특별지부 서기 왕경과 특파원 박윤서는 원 조공당동만도 엠엘파 책임비서 김근 등과 토의하고 룡정에서 10여리 상거한 승지촌 부근 하승리 마을 북쪽, 륙도하 서쪽 산기슭의 펑퍼짐한 언덕 외딴집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하승리 북쪽가의 이 외딴집은 주덕해(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 겸 중국공산당 연변주위 제1서기)의 숙부 오원서(吴元瑞,렬사)가 당조직의 지시에 의해 이곳 외딴집을 사서 최형익과 차정숙을 부부로 가장시켜 생활하게 한 비밀아지트이다. 1931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관련 기사는, 4월 하순 박윤서는 <간도 동량사어구촌 오원서 집에서 김철, 김근 등이 회합> 하였다고 밝히였다. 기사의 동량사 어구촌은 하승리마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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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비밀회의에는 김근과 김철, 소성규, 황기범, 강학제 등이 참가하여 김근과 김철을 총책임자와 실제책임자로 하는 5.1투쟁행동위원회를 내오고 투쟁방안을 연구하였다. 회의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자!” 등 구호를 제기하고 투쟁책략을 확정하였다. 김근이 폭동 총지휘자로, 김철이 폭동 직접책임자로, 황진연이 룡정방면 총지휘자로, 김윤봉이 투도구방면 지휘자로, 한영섭이 천도철도파괴책임자로 되였다.

하승리 북쪽가의 외딴집 비밀회의는 1930년 5.1절 시위를 중심으로 하는 붉은 5월 투쟁과 연변 5.30폭동의 전주곡으로서 룡정촌, 투도구, 천도철도를 중심으로 대중적 5.30폭동을 단행하기로 결의한 중요회의였다. 회의결의에 의해 김철은 또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 제공하는 폭동비용을 맡게 되였고 폭동에 수요되는 작탄, 권총 등 무기의 사용방법과 장소, 사용자를 김철이 책임지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붉은 5월 투쟁의 중심은 룡정이였다. 김철은 동지들인 강학제 등과 상의하고 긴장한 준비에 뛰여들었다. 드디여 5월 1일, 룡정의 200여명 로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청년학생들이 거리에 떨쳐나가 반일시위를 벌려 붉은 5월 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붉은 5월 투쟁은 룡정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터져 올랐다.

1931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관련기사에 따르면 1930년 5월 27일경에 김철은 룡정에서 5.30폭동의 중요한 한갈래인 천도철도연선 폭동지휘자 한영섭을 만나 천도철도의 교량파괴와 방화 등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화룡현 폭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웠다. 이 구체적 방침에 의해 동지인 소성규는 5월 30일에 그 시절 연길현 상의향 세린하 와룡동 김윤봉 집에서 리주헌, 장룡석, 손철운 등 10여명 투쟁골간들이 참가한 비밀회의를 가지고 투도구를 중심으로 하는 화룡현 평강벌폭동대를 파괴대, 방화대, 응원대 3개대로 나누었다.

5월 30일 자정이 다가왔다. 룡정촌이라 불리운 룡정의 여름밤은 깊어가고 삼라만상은 고요한 정적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룡정방면 5.30폭동대원들이 비밀리에 하나 둘 룡정 동산의 대륙고무간판 아래로 모여들었다. 100여명을 이루었다. 원 계획 대로 폭동대는 파괴대, 방화대, 응원대 3개대로 나누어지고 이들 100여명 모임에서 김철은 "오늘밤 룡정을 까막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어 김철의 회중전등암호에 따라 폭동대는 각자의 폭동지로 움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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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행동대는 선참 룡정전기회사를 파괴할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도끼, 몽동이, 석유 등을 휴대하고 전기회사에 밀려가서 보초를 까눕히고 전기회사마당으로 쳐들어간 뒤 송전용전주를 도끼로 찍어넘기고 송전실에 들어가 새로 가설한 배전판의 저항기, 전류계 등을 짓부셨다. 룡정과 투도구 시내는 삽시에 암흙세계로 변하였다.

대불동 부근의 군중들은 부근의 전화선을 절단하여 회령, 대립자, 룡정간의 통신망을 끊어놓았다. 한개 대는 룡정역 천도철도의 정거장 기관고를 습격하였으나 적들의 방어가 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른 한개대는 시내에 들어가 룡정우장거리에 있는 동점복의 철공장 일부와 곡물상 김명희집에 불을 질렀다.

강학제 등 한패의 무장대는 일본동양척식회사 간도출장소사무실에 작탄 2개를 던졌는데 그중 하나가 폭발하여 사무실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날 밤 룡정의 폭동지점마다에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폭동격문들이 쫙 깔리였다.

룡정시 서부근처의 다른 한갈래 폭동대는 5월 31일 새벽에 룡정 서쪽 해란강을 지른 천도철도 목조다리의 좌우교각에 석유를 치고 불을 질러 일제의 운수망을 마비상태에 빠뜨리였다. 온 룡정은 화광이 충천하고 총성이 은은한 속에 폭동의 함성은 여기저기서 그칠줄 몰랐다. 1931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간도일본총령사관 순경들이 기관총을 란사하여 수많은 군중이 쓰러졌다고하나 이는 실제사실이 아닌것으로 알려진다.

룡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변 5.30폭동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연변경내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절차의 중요활동이였다. 하기에 그네들은 목숨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룡정이 그러하고 투도구가 그러하고 천도철도연선이 그러하다. 폭동임무를 수행한 각지의 폭동대원들은 신속히 해당 구역에서 철거하여 어둠 속에 사라졌다.

6월초의 어느 날 룡정의 폭동지휘부에서는 모 곳에서 다과회를 열고 피로를 풀었다. 한차례 큰 폭동을 치른 김철은 홀가분한 기분이였다. 강학제가 시흥이 도도하여 즉흥노래를 지어부르자 김철이 앞장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다과회는 웃음소리, 노래소리 차고넘쳤다.

  6월 9일 밤에 김철 등 폭동지휘부의 성원들은 모아산 아래의 백가더기(광신향 광신4대 뒤언덕)에 자리잡은 강학제의 집에 잠간 들려 식사를 하고는 그 길로 승지촌 부근의 하승리 비밀아지트로 올라갔다. 그들은 밤길의 피로도 풀 사이 없이 인차 모여앉아 차후 투쟁에 관한 중요제의안을 토론하였다. 회의는 밤새도록 끝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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