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5.30폭동의 주요지도자 김철 (3)

2021-09-06 0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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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홀제 비밀아지트는 불의지변을 당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경찰 40여명이 일시에 덮쳐들었다. 때는 새벽 3시경이였다. 비밀아지트의 식모가 밀정이였던 모양이다.

“땅, 땅-”

새벽의 찬 공기를 썰며 들리는 아츠러운 총소리, 동지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을 땐 이미 늦었다.

“적들이다!”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최형익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때 동지들의 유일한 무기는 강학제 수중의 호신용 단총 뿐이였다. 순간, 김철이 단총을 잡으며 웨쳤다.

“동지들, 내가 엄호할 테니 빨리 뛰시오!”

“아니, 내가 엄호하겠소!”

강학제가 김철의 손에서 단총을 앗아들면서 말했다.

“지금 네시 직전이요. 순간도 지체할 수 없소. 동무들은 두 길로 나누어 뛰시오!”

바로 이때, 정주간에서 자고 있던 식모가 밖으로 뛰여나가면서 무엇이라 소리쳤다는 설이 있다. 삽시에 적들의 사격이 집중되였다.

강학제는 부채형을 지어 포위해오는 적들을 향해 사격하면서 김철 등을 보고 재촉하였다.

“혁명자의 경우가 본래 이러하오. 우리는 혁명을 위하여 죽을 뿐이요.”

김철은 강학제의 굳어진 얼굴에서 한 혁명전사의 비장한 결심을 읽었다. 그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강학제가 엄호하는 틈을 타서 어서 밖으로 내뛰라고 소리쳤다. 강학제의 단총이 다시 울렸다. 그가 홀몸으로 막아서며 걸싸게 답새기는 사이 김철이 뒤문을 열고 산으로 내달렸다. 적들의 사격이 일시에 그에게로 집중되였다. 황기범 등 여럿은 그 틈에 쏜살같이 달려나가 숲속에 사라졌다.

김철이 갑자기 푹 고꾸라졌다. 그는 왼쪽 어깨와 오른 무릎(무릎에 각기 두방 맞음) 등 세곳에 총상을 입었다. 최형익은 미처 빠지지 못하고 기여서 부엌에 숨는 수밖에 없었다. 강학제가 총질을 해대며 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의 령혼이 멀리 구천에 가서라도 폭탄이 되여 너희들을 복멸하리라!”

강학제는 홀몸으로 두시간 남짓이 견뎌냈다. 그는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지막 한발이 남자 자결로 24살의 순결한 삶을 마감했다.

강학제의 총소리가 멎자 2명의 중상자를 낸 적측에서 집안에 들이닥쳤다. 부엌에 숨었던 최형익과 몸에 중상을 입은 김철이 산기슭에서 체포되였다. 적들은 기고만장해서 마차에 김철, 최형익과 강학제의 시체를 싣고 룡정으로 돌아갔다.


8

김철을 통한 연변 1930년 6월 10일 혈전의 자초지종이다. ‘6.10’ 혈전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연변 경내에서 벌어진 일본침략자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첫 무장투쟁으로 기록된다. 첫 무장투쟁의 진두에는 김철과 강학제가 있었다.

김철은 룡정으로 압송된 후 간도일본총령사관 지하류치장에 갇혔다. 적들은 그에게서 무슨 단서라도 잡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였지만 끝끝내 그의 입을 열지 못하였다. 필자의 다년간 연구에 따르면 김철은 모진 아픔을 참으면서 일주일간 단식투쟁을 견지하다가 일제를 단죄하는 혈서를 쓰고 끝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시절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추적뉴스를 보면 김철의 단식투쟁이나 혈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1930년 7월 30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ㅡ <폭동수령(首领) 피의자 김철 병세 위독>에 따르면 김철은 총령사관 류치장에 투옥된 후 상처가 깊어 밥과 같은 음식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류치장측에서는 끼니마다 죽을 마련하였다. 그러던 이해 7월 24일 밤에 김철이 류치장 간수에게 밥을 청하였다고 한다.

죽이 아닌 밥은 확실히 금물이였다. 이튿날 7월 25일 한시부터 김철은 돌연히 몸이 붓기면서 병세가 위독해졌다. 7월 30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죽을 먹다가 밥을 먹은 것이 위독해진 원인이라고 밝히였다. 한해 후인 1931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는 1930년 6월 14일에 김철이 간도룡정총령사관 류치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사실과 다른 기사임이 《조선일보》 자체 기사들에서 드러난다.

우에서 인용한 1930년 7월 30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김철은 1930년 7월 25일까지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날 신문에 앞선 1930년 7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ㅡ<간도사건 주범 김철 자살미수>는 김철이 류치장에서 “자살을 도모하다가 간수의 눈에 발각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쓰고 있다. 자살도모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피살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김철이 피살되였다는 오보였다. 1930년 6월 17일 《조선일보》 2면 기사는 피살되였다는 김철은 류치장에 투옥된 김철이 아니라 ‘전 민성보의 기자’ 김철이라고 찍었다. 그러던 《조선일보》는 며칠 후인 6월 26일 7면 기사 ㅡ<김철씨 피살은 허설(虚说)>에서 “확실한 탐문에 의하면 피살이 아니요 아직도 여전히 민성보의 기자로 활동한다.”고 정정기사를 냈다.


9

김철 관련 존재하지도 않은 피살설의 정체를 밝혀보았다. 그만큼 김철은 중국공산당 당원이요, 1930년 연변 ‘5.30’폭동의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모저모는 여론의 깊은 관심과 추적뉴스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 추적뉴스들이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에게 생생히 다가와 김철 렬사를 옳바로 리해하도록 한다.

그럼 김철은 언제 희생되였을가, 1930년 8월 6일 《조선일보》 2면 기사ㅡ<간도습격 수모자(首谋者) 김철 령어중 사망>에 따르면 1930년 8월 “2일 오후 한시에 류치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당년 《조선일보》 기자의 ‘간도특전’으로서 그 시절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여러 기사를 대비하면 가장 믿음이 가는 기사라고 밝혀둔다.

  1930년에 김철은 29살이였다. 연변과 북만대지를 주름잡으며 일본침략자들과 싸우던 중국공산당 당원 김철은 이렇게 동지들의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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