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연의 길

2021-10-18 08:35:35

장군과 귀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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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29일, 한락연은 8년여 해외에서의 생활을 접고 드디여 귀국선에 올랐다.

마르세유항에서 떠나는 호화객선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각양각색의 승객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한명의 특수한 인물도 타고 있었다.

바로 세계를 놀래운 ‘서안사변’의 주역 양호성 장군이였다.

여기서 잠간 ‘서안사변’과 양호성 장군에 대해 필봉을 할애하기로 한다.

한락연의 귀국의 행적이 바로 양호성 장군의 행로와 끈끈한 련계의 동아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호성은 1893년 섬서성 포성현(蒲城)에서 태여났다. 원래 비적에 가담했던 경력도 있으나 1911년 신해혁명에 뛰여들었다. 성격이 용맹하여 호신(虎臣)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1917년에 섬서정국군(陝西靖国军)에 참여하여 북양군벌에 대항하였다. 1931년부터 17로군 사령관을 겸하면서 휘하에 3만의 병력을 거느려 섬서성의 최고실력자가 되였다.

1935년, 12.9운동이 일어나고 항일여론이 거세지자 장학량과 양호성은 내전정지와 항일문제를 두고 고심했다. 함께 군관훈련단을 설치하여 장학량이 단장을, 양호성이 부단장을 맡아 공동으로 항일정치교육을 실시하였다.

1936년 12월, 장학량과 양호성은 본인이 직접 포위소탕전 사령관을 맡은 장개석이 이끌고 온 국민당 군 고위 지휘관들의 소탕전 독전(督战)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장개석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즉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공산당을 먼저 섬멸하고 일본과 싸운다는 정책과는 달리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서안에 온 장개석를 만나 다시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건의하였으나 장개석은 들은 척도 않았다. 두 사람의 간청에 장개석은 수렴은커녕 지어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장개석은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과 애첩인 양귀비의 휴양 별궁이였던 화청지(华清池)에 머물고 있었다. 장개석은 화청지에서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두가지 방안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압박했다.

포위소탕 명령에 복종해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17로군을 전부 섬서, 감숙 전선 작전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포위소탕전을 원하지 않으면 동북군은 복건, 17로군은 안휘성으로 각각 이동하고 이 지역을 중앙군에게 넘기라고 윽박질렀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번갈아 장개석이 묵고 있는 화청지에 찾아가 “국가민족의 존망이 이미 마지막 갈림길에 있습니다. 항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내전을 그치지 않으면 항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고 비분강개하며 간언하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공산당 소탕전 계획은 바꿀 수 없다고 또 한번 간언을 무시해버렸다. 두 사람은 화청지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차례 간언해봤으나 이런 부드러운 방법으로는 씨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방법인 무력으로 간언하기로 마음먹었다.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은 동북군과 서북군을 인솔해 병란을 일으켰다. 서안일대를 장악한 이들은 동트기 직전 장학량의 친위병력을 화청지에 투입해 장개석의 경호대를 제압해버렸다.

잠결에 총소리에 놀란 장개석은 화청지 뒤산 려산등성이로 달아나 바위 밑에 숨어있다 군사들에 붙잡혔다. 장개석은 신발도 바로 못 신고 잠옷 바람으로 눈밭으로 달아나다 쩔쩔매며 사로잡히는 일대의 굴욕을 겪었다.

장개석을 구금한 뒤 장학량과 양호성은 8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남경정부를 개편해 각 당, 각 파를 참여시켜 구국정부로 재조직하고 모든 내전을 정지하고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일본침략에 대항해 거국적으로 전면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즉각 찬성을 표하였고 주은래를 위시로 공산당 대표들이 서안으로 날아와 공동항일의 의사를 발표하였다.

서안사변은 세계를 놀래웠고 국내외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서안은 곧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였다.

이후 장개석은 구두로 국공합작에 동의하고 석방되였다. 이로써 장학량과 양호성은 주은래 등과 협의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기약하는 제2차 국공합작을 이뤄냈다.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여 장개석은 풀려났다.

장개석은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장했고 장학량이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남경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하지만 장개석은 무치하게도 풀려나자 곧 보복의 칼날을 빼들었다. 장학량은 지휘권이 박탈되여 10년 금고형에 처해졌고 양호성도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장개석은 ‘구라파고찰군사전원(军事专员)’이라는 허울 좋은 명칭을 달아 양호성을 유럽에로 내보냈다. 명목은 선진유럽을 방문하는 것이였으나 실제로는 강제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울분에 가득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중 양호성은 ‘로구교사변’ 소식을 접했다. 국난의 긴요한 관두에 애국장령은 한가하게 이역을 떠돌 수 없었다.

양호성 장군은 련이어 남경국민정부와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내여 귀국하여 항전에 뛰여들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번마다 거절을 당했다. 일제의 마수에 유린당하고 있는 조국의 존망에 애간장을 태우고 있던 양호성은 탄원이 수납되지 않았지만 단연히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하면 다시 범의 굴로  돌아오는 것이니 절대 돌아오지 마시오.”

장개석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귀국하면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거듭 만류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미 관내까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들은 양장군은 더는 앉아있을  수 없어 모두의 굳은 만류도 뿌리치고 부인과 아들애와 함께 귀국선에 오른 것이였다.

한락연은 양호성 장군과 초면이 아니였다.

몇해 전 유럽 각국을 순방중이던 양호성 장군이 빠리를 방문하자 빠리 《구국시보》의 사진기자로 있던 한락연은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장문의 인터뷰를 가지면서 그의 항일업적을 프랑스사회에 알리려고 나름 노력했던 한락연이였다. 그리고 《빠리시보》, 《구국시보》 등 언론사들이 양호성 장군 일행을 초대하였을 때 한락연도 기자 신분으로 초대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외교부 고문을 지낸 온붕구(温朋久, 온가보 전 총리의 조부)의 회억록 《한락연 동지는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에서 보면 “나와 부인은 1937년 7월 독일에서 프랑스 빠리로 갔다. 당시 반제동맹에서 거행한 세계반전대회와 8월 양호성 장군을 환영하는 회의에서 몇번 한락연 동지와 함께 한 적이 있다.”고 회억하고 있다.

글에서 온붕구는 “그는 언제나 친절했고 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남들과도 구김 없이 속을 털어놓군 했는데 그가 나눈 이야기는 모두  다 어떻게 파시즘의 침략을 반대하고 장개석을 뒤엎고 나라를 구할 것인가 하는 내용들이였다.

언제나 카메라가 아니면 그림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니면서 수시로 창작을 하군 했다.

그렇게 많은 구라파 류학생들중에서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사람은 신성해와 한락연이였다.”고 술회했다.

배에는 또 프랑스와 독일에 체류 중이던 공산당원과 청년단의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유럽의 중국공산당조직은 한락연 및 이들 10여명을 선정해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하게 한 것이였다.

“젊은이들을 보니 힘이 솟누만.”

양호성 장군이 호탕하게 웃으며 젊은이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자, 우리 사진 한장 남깁시다.”

일행은 갑판에서 양호성 장군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락연은 중절모를 정히 눌러쓰고 양호성 장군의 뒤편에 섰다.

두번째 줄 왼쪽 두번째가 양호성 장군이고 그 뒤편에 중절모를 쓰고 안경을 건 한락연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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