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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은 나의 고향》

―성직속 파견단련간부 장명화 사적

  • 2007-05-30 10:21:26
2년간 왕청현 부현장으로 파견단련을 내려왔던 성총공회 국제련락부 부장 장명화는 사업의 수요로 인해 5.1절 즈음하여 파견단련기한을 앞당겨 결속지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군중들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배웅하러 온 사람들중에는 기관간부도 있었고 일반백성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장명화가 파견되여 온 2년간이 너무도 짧다며 아직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지도 못했는데 조금만 더 왕청에 머물렀으면 얼마나 좋으랴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2005년 8월 1일, 장명화는 생활조건이 우월한 성소재지에서 천리밖에 있는 국가빈곤현인 왕청현에 파견되여왔다. 파견받은초기 현에서는 미처 장명화에게 구체적사업을 배치해주지 못했다. 그는 주동적으로 향진, 촌툰, 농호, 현직속부문과 30여개 기업에 심입해 왕청현의 사회발전, 인문, 지리, 민풍민속 등을 료해했고 모든 기회를 빌어 왕청현의 자원우세와 투자유치 우대정책을 선전했다.

2006년 설, 현정부지도일군의 분공에 따라 장명화는 현장을 협조해 로동및사회보장, 로령사업위원회, 장애자련합회, 사회보험 등 부문을 책임졌고 4개 보험회사를 련계했으며 또 선후로 교육, 위생, 문체, 라지오TV, 인구및계획생육, 신소고발, 인민방공, 관광, 서류, TV네트망회사 등 여러개 부문을 책임졌다.

그후 그는 해마다 각 부문의 주관지도일군들과 한자리에 모여 사업의 돌파구를 찾고 사업중점, 책략을 확정했다. 그의 참여하에 현로동및사회보장부문은 도시주민의료보험, 공상보험 및 각항 사회보험사업을 일층 추진하였다.

또 전 성에서 처음으로 3대림업국을 의료보험범위에 넣었는데 이 사업은 성정부의 표창을 받았다. 2006년, 현로동및사회보장국은 현에서 종합사업선진단위로 표창받았고 현장애자련합회는 주동적으로 성과 주 장애자련합회의 지지를 쟁취, 해마다 100여명 빈곤백내장환자에게 무료로 백내장수술을 해주었으며 현적십자회에서는 국가, 성, 주 적십자회, 국제자선기구와 련계를 맺고 자금과 약품을 쟁취했다. 현로령사업위원회도 사업의 새로운 책략과 방법을 모색했다. 《저녁노을》예술단은 선후로 동북 및 주내에서 영예를 받았고 지난해에는 국가로령사업위원회의 표창을 받았다.

그는 책임맡은 부문의 사업을 더 높은 차원에 끌어올리기 위해 수차례나 주관부문 책임자들과 함께 성, 주 관련부문에 찾아가 전문항목과 전문자금을 쟁취했다.

장명화는 사업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항상 남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다. 장명화는 신소하러 온 군중들을 열정적으로 접대하면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정책에 따라 해결, 즉시 해결할수 있는 사건은 현장에서 해결하고 정책의거가 없거나 잠시 해결할수 없는 사건은 상세히 해석해주었다.

그가 접대한 신소군중들중 십여명은 다년간 신소를 해온 사람들이였는데 해결을 받고 더는 신소를 하지 않았다. 또 한 부녀가 가정형편때문에 딸의 고중 학잡비를 내기 어려워 장명화를 찾아오자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500원을 꺼내여 그녀에게 주고 관련부문에 지시하여 책임지고 부족한 부분을 해결하도록 했다. 동성가두의 한 남성이 뇨독증에 걸린 안해를 구하기 위해 집안의 돈 될만한 재산을 모두 팔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 사실을 알게 된 장명화는 이 부부의 사연에 감격해하면서 이름도 남기지 않은채 500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그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적십자, 장애인, 빈곤정리실업종업원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또 자신이 절약한 사무경비로 재정난을 겪고있는 어려운 부문을 도와주면서도 자신은 공금으로 전화료금 한번도 결제하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현의 혈액고가 바닥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그는 혈액채집차에서 의무헌혈을 했다.

2006년 9월 11일, 20여명 대만동포를 실은 관광뻐스가 왕청경내에서 강에 추락되여 3명이 사망하고 기타 대만동포들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위생사업을 책임진 그는 인차 구급사업을 전개했고 구급차에 실려온 대만동포를 안고 구급실로 뛰여갔다. 오후 4시, 부상당한 대만동포들을 전부 배치해놓은후에야 그는 총망히 점심식사를 마쳤다. 구급사업과 사후처리사업을 제때에 펼쳤고 빈틈없이 배치했기때문에 대만동포들은 만족을 표했고 고마움을 금치 못했으며 국가, 성, 주의 긍정을 받았다.

장명화는 사업에서 직책을 다했다. 매일 하루일정을 빼곡이 정해놓은 그는 한달에 한번씩도 집에 갈 시간이 없었다. 맏아들인 그에게는 70세를 넘긴 부모가 있는데 아버지는 뇌졸증으로 앓고있었지만 그는 사업때문에 부모를 돌보는 일을 동생에게 맡겼다. 80여세 장인장모도 하나밖에 없는 딸과 사위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신 늘 출장때문에 외출하는 딸과 파견간부로 왕청에 내려온 사위때문에 외손자를 돌볼 때도 많았다.

지난해 아이의 고중입학시험때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낮에는 사업때문에 분망히 돌아쳤고 저녁이면 숙소에 돌아와 량가부모에게 안부를 전했고 아이의 학습정황을 물어보았다. 그는 늘 자신이 훌륭한 남편으로, 아들로, 사위로, 아버지로 되지 못했다면서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사업과 가정을 두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회없이 사업을 우선 선택할것이라고 했다.

4월중순, 월말전으로 파견단련사업을 마무리하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계속하여 마지막 날까지 일터를 고수했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환송할 겨를을 갖지 못했다.

고향처럼 정이 들대로 든 왕청을 떠나면서 장명화는 《비록 몸은 왕청을 떠나지만 왕청의 후덥고 선량하며 부지런한 인민들과 아름다운 산천초목을 잊지 못할것이다. 나의 고향과도 마찬가진 왕청의 발전을 위해 나는 소임을 다할것이다》고 다짐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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