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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행복

  • 2008-06-18 18:42:07
땅이 척박하여 수확량이 낮고 수입이 적은 농촌에서 우리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짓는 한편 여러가지 부업도 하면서 두 아들을 남부럽잖게 결혼시키고 귀여운 손녀까지 보았다. 그리고 돈을 들여 며느리의 호구를 시내호구로 넘기고 개산툰섬유공장에 림시일자리도 얻어주었다. 그런데 마냥 행복하기만 하던 우리 가정에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줄이야.

1996년 11월 6일, 천성이 부지런하고 남돕기를 즐기는 며느리가 교대준비를 위해 기계밑의 나무껍질을 청소하다가 앗! 소리와 함께 기계피대에 감겨들었다. 눈깜빡할 사이에 생긴 끔찍한 사고였다. 발끝이 이마에 닿인 자세로 며느리는 너비 60센치메터, 길이 100메터 되는 피대에 감겨 휙 한바퀴 돌아갔다. 척추뼈 마디마디에서 우드득우드득하는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린근 병원에 긴급호송된 며느리는 구급처치를 받은 뒤 즉시 연변병원에 옮겨졌다. 척추가 엄중히 손상되고 골수에 피가 흘러들어갔으며 하신이 마비되여 손가락 하나 꼼짝할수 없었다. 대량의 출혈로 여러차례 수혈을 했고 크고작은 수술끝에 나중에는 척추 전체를 철판을 대고 나사못으로 고정했다. 생사선을 넘나드는 며느리를 두고 우리 부부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의사선생님의 고명한 의술과 가족들의 정성에 떠받들려 며느리는 기적같이 살아났고 치료효과도 좋아 5급 장애인으로 판정됐다. 병마와 싸워온 2년간 며느리는 천금 주고도 바꿀수 없는 뜨거운 가족애가 고통을 이겨낼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됐다고 했다.

해가 가고 달이 가면서 며느리의 상처도 점점 나아지고 손녀도 커갔다. 손녀가 개산툰진소학교에 붙자 며느리의 희망은 더욱 부풀어올랐다. 엄마의 상처로 하여 일찍 셈이 든 손녀가 성격이 유순하고 진취심이 강하고 공부도 잘하자 딸의 전도를 위해 며느리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가려 했다. “며느리는 살아있는것만으로도 족하니 자기 건강만 잘 챙겨달라”는 우리의 만류도 마다하고 결국 한국으로 떠났다.

이국땅에서 며느리는 불편한 몸으로 이곳저곳 뛰여다니면서 끝내 일거리를 찾았다. 마비된 발을 힘들게 옮겨디디면서 어찌도 열심히 일을 하였는지 회사측에서는 급여도 올려주고 퇴직금보험수속도 해주었다.

손녀도 공부를 잘해 3학년에 올라와서는 중대장으로 됐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게 하고싶어 아들, 며느리 소원대로 손녀를 연길시연신소학교에 전학시켰다. 손녀는 한국에서 고생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시내학교에 와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때 전교 22등까지 했다. 이리하여 시외학생들이 중학교입학시에 내야 하는 3000원 교육비를 면제받는 행운도 지니게 됐다.

부모와 떨어져있은 6년 동안 손녀는 소비돈을 아껴쓰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한국려행요청을 거절하고 박약한 과목 복습에 나섰다. 앓는 엄마가 번 돈을 어떻게 써야 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손녀였다. 그 모습이 너무 대견하여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생끝에 락이라고 지난해 아들과 며느리는 몇년간 고생하며 번 돈으로 연길에 새 아빠트를 사놓았다. 장식도 하고 가구도 사들였다. 살아만 있어도 좋다던 며느리가 기적같이 일어서고 또 부부간이 이국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번 돈으로 새 보금자리도 마련하고… 참으로 살맛나는 요즘, 우리 가족엔 또다시 웃음과 행복의 꽃이 찰랑이기 시작했다. 유병문 장금자 구술 장순녀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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