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연변축구 “중원” 차지했었다”
2004년 갑급리그에 복귀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2018-11-19 15:15:23

“꼴! 꼴! 꼴! 연변팀이 또 한꼴 넣었습니다.”,“연변팀이 또 꼴을 넣었다오! 연변팀이 갑급리그에 진출했소!”

2004년 11월 5일 오전, 집집마다 라디오 앞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연변인민방송국 생방송팀이 하남 정주에서 보내드리는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 결승전’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축구 갑급리그의 가장 신선한 활력소로, “거물사냥군”이라는 화려한 평가를 받았던 연변팀이였지만 “을급”팀으로 추락한 이후 동산재기는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형편에, 변방 한끝에서 굴기하는 연변팀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도 험했고 좌절의 시간은 한해 두해 이어져갔다.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은 파도처럼 덮쳐왔고 연변팀은 눈물로 가슴을 쓸어야 했다. ‘결승단계 진출! 가자, 갑급 무대로!’

연변축구가 천신만고 끝에 2004년 ‘전국축구 을급련맹경기’ 결승전에  진출하자 세간의 화제는 ‘축구’ 이야기로 도배되였고 모든 매스컴은 축구에 초점을 맞춰갔다.

“최고의 시설, 최고의 프로”를 지향했던 연변인민방송국 지도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고 생방송팀을 정주에 특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당시 뉴스부 주임 남철씨와 필자를 생방송 사회자로 선정하였다.

라디오축구 생방송은 비교적 복잡한 공정이라고 보면 된다. TV 생방송은 화면을 보면서 진행하면 되지만 라디오 생방송은 청각 예술을 시각예술로 전환시켜야 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형상적으로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전해줘야 한다.

뉴스부를 떠나 과학생활부의 책임자로 스포츠 생방송과는 관계없던 필자였지만 ‘전국축구 을급련맹경기 결승전’라는 중대한 사항 앞에서  또 다시 조직의 부름을 받은것이였다.

9월 26일, 연변의 18명 열혈축구팬을 가득 실은 연변세기집단의 중형뻐스가 정주로 향발하였고, 필자와 남철씨는  연길시 축구팬협회의 류장춘 회장 일행과 함께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제발 려로에 지쳐  앓지 말아야겠는데…” 기차에 누워 가면서도 류장춘 회장은 침대차도 아닌 비좁은 중형뻐스에 앉아 2400킬로메터를 달려가는 축구팬들을 걱정하였다. 2박 3일만에 우리는 침대차에 앉아 마침내 정주역에 내렸다.

정주에 들어서는 순간 조조며, 류비며, 제갈공명이며… “삼국연의”에서 읽었던 영웅호걸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고 그들이 호령했던 ‘천군만마’의 함성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았다.

얼마나 많은 영걸들이 이 중원땅을 차기하기 위해 풀잎 이슬로 사라졌던가?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우리는 웃을수가 없었다. “18명 용사”를 실은 세기집단의  중형뻐스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9월 29일 저녁 9시 30분, 60시간、 2400킬로메터를 달리면서 료녕 、하북、천진、북경을 지나온 중형뻐스가 마침내 정주에 도착하였다. 세수 한번 제대로 못하고 비좁은 뻐스안에서 쪽잠을 자면서 달려 온 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공지에 일하러 떠나는 “민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였다. “연변팀, 해낼겁니다. 중원을 얻으면 천하를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연변축구는 꼭 중원을 차지할 것입니다.” 축구팬중의 누군가가 말하자 모두가 “연변 필승!”을 웨쳤다.

정주에 도착하자 좋은 기상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하남성 허창 조선족축구팬들이 내건 ‘동산재기 중원에서 시작, 장백호랑이 중원에서 포효하다’ 라는 거폭의 현수막이 운동장에 나타났고   정주시에 있는 네개 대학교의 30여명 조선족축구팬들이 응원팀에 합류하였으며 연변팀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린 원 연변팀 고훈 감독의 부인이 축구팀에 3천원을 보내왔다…

경기의 공정성을 위해 하남 정주에 모여서 치르는 경기인지라 홈과 원정 구분이 없었다. 원정에서 많은 피해를 봤던 연변팀에게는 호재였다. 장내에는 연변팀 응원단 외에는 넝마주이군밖에 없을 때가 많았다.

열혈축구팬들의 결사적인 정신에 힘을 얻은 연변팀의 눈빛에는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빛발쳤고 파죽지세를 이어갔다. 총점수  8대4로 산동태안구거룡팀을 도태시켰고 운남리강동파팀과의 첫 게임에서 3대1로 이겼다. 운남리강동파팀은 신흥 강호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믿고 갑급팀 진출을 노리는 을급팀중 ‘금원축구’(金元足球)의 원조라고도 할수 있다.

두번째 경기에서까지 지면 갑급팀 진출이 무산되는것을 알고 있었던 운남리강동파팀은 급기야 ‘인맥축구’를 내세웠다. 바로 북경에서 중국축구협회 실세였던 전임 부주석 마극견을 모셔온것이다. 중국축구협회 부주석까지 지냈던 거물급인사가 운남리강동파님을 위해 정주에 나타났다는것은 연변팀으로 말하면 ‘지진’에 버금가는 뉴스였다.

‘생태균형’를 깨뜨리는 결과가 나타날수도 있다는 불길함을 안고 주정부 부주장과 체육국 국장 그리고 축구팬협회 책임자들이 참가한 긴급회의가 소집되였다. 온 저녁 머리를 짜보았지만 대안이 없었다. 답은 오직 하나, 이기는 길 뿐이였다.

빅어도 갑급팀에 진출하고 설사 진다고 해도 두꼴이상 먹지 않으면 진출할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검은호르래기’의 피해를 유난히도 많이 봤던 연변축구팀한테서 결사 항전의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변팀, 필승! 연변팀, 필승! 연변팀, 필승!”, “져도 내형제, 이겨도 내 형제!” 결전의 날인  11월 5일,  팬들의 응원소리가 축구장을 메우기 시작하였고 가무의 고향인 연변을 대변할수 있는 노래들이 축구장에 흥그럽게 울려퍼졌다. 그러던중 의외의 일이 생겼다.

외국에서 들여 온 생방송 설비가 고장난듯 기능을 잃은 것이다. 자칫 생방송 중대사고가 터질 판국이였다.  “핸드폰으로 합시다!”

남철씨가 그때 한창CCTV스포츠프로에서 광고중이던 ‘핸드폰중의 전투기’라는 자기의  핸드폰을 꺼냈다. 필자의 핸드폰까지 쓴다고 해도 90분간 생방송을 하려면 핸드폰이 몇개는 더 있어야 했다.

“시름 놓고 생방송 하십시오.” 연길시축구팬협회 류장춘 회장이 선참으로 핸드폰을 가져왔다. 한사람, 또 한사람...말 한번 나눠보지 못했던 축구팬들마저 자기의 핸드폰을 생방송하는 우리의 책상우에  말없이 올려 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핸드폰 가게를 차린것처럼 우리 앞에는 각종 류형의  핸드폰이 ‘진렬’됐다. 연변축구에 대한 감동이고 열망이고 사랑이였다.

우리는 핸드폰을 엇바꿔가며 생방송을 시작하였다. 핸드폰을 쥔 우세를 빌어 고정된 위치에서 생방송하던것을 타파하고 관중석에까지 직접 찾아가 생방송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핸드폰으로 생방송을 한 우리의 모습은 정주시내에 있는 기자들에게 포착되였고 정주일간지 스포츠면에 버젓이 실리기까지 하였다.

거대한 중국축구무대에서 혈혈단신인듯한 서러움이 격발되여서였을가? 연변팀의 필승 의지는 중원을 구르고 하늘을 찔렀다. ‘11마리’의 동북호랑이를 풀어 놓은듯 운동장에는 우리 선수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패스도 정확했고 슛도 정확했으며 전술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4:0, 연변팀, 연변팀이 4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마침내 갑급리그에 진출하였습니다. 장백호랑이는 중원을 정복하였고 연변 축구는 또다시 새로운 력사를 쓰게 되였습니다...”

어찌보면 내 인생의 마지막 생방송이였던 2004년 11월 5일, 연변축구의 새로운 지평선을 지켜보면서 나와 남철씨는 얼마나 소리질렀는지 모른다. 관중석에 있을 때 꼴이 터질 경우 우리는 축구팬들과 함께 함성을 질렀고 우리의 목소리는 전파타고 천가만호에 울려퍼졌다.

올해 박태하 감독이 이끌던 연변팀이 마지막 한껨을 앞두고 갑급팀에 잔류하는것을 보면서 눈물로 얼룩졌던 2004년 그 때 초겨울, 춥지만 춥지 않았던 그 초겨울이 생각 나 이렇게 필을 들었다.

2004년, 연변축구는 분명 중원을 지배했고 ‘천하’를 얻었다. 연변팀,  또 한번 ‘중원’을 차지 할 그 날을 기대한다.

허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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