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마라도나, ‘축구의 신’이 떠났다

2020-11-30 08:53:05

리오넬 메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르헨띠나의 모든 축구 유망주들은 하나같이 ‘제2의 마라도나’로 불렸다. 하지만 수많은 ‘제2의 마라도나’중 한명이던 리오넬 메시가 결국엔 ‘제1의 메시’가 된 뒤에도 마라도나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팀과 클럽에서 모두 범접하기 힘든 성과를 낸 마라도나의 선수시절은 트로피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마라도나의 선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마도 월드컵 제패일 것이다. 게다가 마라도나는 뛰여난 선수시절을 뒤로 한 채 금지약물 사용과 마약 투여, 탈세에 인종차별까지 얽힌 사건 사고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사고뭉치 레전드로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20년 11월 25일, 만 60년 26일을 지구에 머물다 떠난 력대 최고의 축구천재이자 나폴리의 신, 아르헨띠나의 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1986년 메히꼬 월드컵에서 5꼴, 5도움으로 아르헨띠나의 우승을 이끈 마라도나.

■천재소년의 등장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했다. 마라도나에게 딱 들어맞는 속담이다. 1960년 10월 30일생인 디에고 알만도 마라도나는 동네 축구에서의 뛰여난 활약이 입소문을 타 빅 클럽의 주목을 받게 된다. 열살 무렵, 지역 축구팀에 뽑힌 마라도나는 곧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명문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오스의 유스팀에 입단하게 된다.

마라도나가 1군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76년 10월, 아직 만 16세도 되기 전의 일이다. 아르헨띠나 프로축구 사상 최년소 데뷔였고 3주 뒤에는 최년소 득점까지 터뜨린다. 이후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해 아르헨띠나 리그 우승컵을 손에 쥔 그는 198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입단하며 유럽에 진출한다. 당시 바르셀로나가 보카주니어스에 지불한 이적료 760만딸라는 세계 최고액 기록을 깬 금액이였다.

■세계무대로

마라도나가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첫선을 보인 것은 1979년 8월 일본에서 개막된 FIFA 청소년 월드컵 대회였다. 당시 마라도나는 아르헨띠나를 이끌고 6꼴(득점 2위)을 터뜨리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아르헨띠나는 6경기에서 20꼴(2실점)을 터뜨리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쳤고 MVP는 당연히 마라도나의 차지였다.

마라도나의 첫번째 월드컵은 1982년 스페인 대회였다. 만 21세의 마라도나는 아르헨띠나가 치른 5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했지만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대회 내내 거친 반칙에 시달리던 마라도나는 마지막 경기인 브라질전에서 패색이 짙던 경기 막판 상대선수 가격으로 퇴장당했다.

마라도나와 스페인의 인연은 썩 아름답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두 시즌도 부상과 론난으로 점철됐다. 두 시즌 동안 리그 36경기에 나선 것이 전부였고 마지막 경기였던 1984년 코파 결승전에서는 패배 후 난투극을 일으켰다.

이 시합에서 마라도나는 상대팀 선수 세명을 련달아 강하게 폭행했는데 이것이 집단 란투극으로 이어졌다. 경기 내내 상대팀 빌바오 선수들의 살인 태클과 모욕적인 조롱에 시달린 결과였다. 더군다나 마라도나는 불과 8개월 전 바로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상대팀 선수 고이코에체아에게 거친 태클을 당해 3개월간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구단 수뇌부와 꾸준히 갈등을 일으켰던 그를 이 사건을 빌미로 내보내기에 이른다. 결국 마라도나는 스페인에서 뛴 2년 동안 리그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한 채 이딸리아로 향한다.


■제2의 고향, 나폴리

바르셀로나를 떠난 마라도나의 다음 행선지는 나폴리였다. 마라도나는 1984년 7월, 나폴리의 홈 구장 산 파올로에 모인 무려 7만 5000명의 팬 앞에 첫선을 보였다.

나폴리가 마라도나 영입을 위해 바르셀로나에 지불한 이적료는 1050만딸라였다. 또다시 력대 최고액 기록을 경신한 마라도나는 세계 최초로 몸값이 천만딸라를 넘긴 선수로 기록됐다. 그리고 나폴리사람들은 마라도나가 자신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딸리아 축구의 주도권은 북부(밀라노, 토리노)에 있었고 여기에 수도 로마를 연고로 하는 팀들이 간헐적으로 정상에 오르는 정도였다.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직전, 나폴리의 순위는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방증한다. 1983-1984 시즌 나폴리는 이딸리아 세리에A 강등권(14위)에서 고작 승점 1점을 더 따 잔류에 성공한 팀이였다.

나폴리에 입성한 마라도나는 팀을 순식간에 강자의 반렬에 올려놓았다. 이딸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남부와 북부의 지역 감정이 극심한 나라인데 당시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나폴리사람들은 마라도나를 앞세운 축구팀 나폴리가 북부의 강자 유벤투스와 두 밀란을 꺾을 때마다 카타르시를 느꼈다고 한다.

첫 시즌인 1984-1985 시즌, 마라도나는 14꼴로 득점 3위에 오르며 팀을 8위까지 끌어올렸는데 팀 순위보다 홈에서 단 1패밖에 하지 않는 성적으로 팬들을 흥분시켰다. 이듬해인 1985-1986 시즌, 나폴리는 리그 3위에 오르더니 급기야 1986-1987 시즌 팀 력사상 처음으로 리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주장 완장을 찬 마라도나를 앞세운 나폴리는 내친 김에 코파 이딸리아에서도 정상에 올라 ‘더블’을 달성한다.

정치, 경제는 물론 축구에서도 늘 변방에 머물던 나폴리가 들어올린 우승트로피는 마라도나를 도시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나폴리 사람들의 마라도나를 향한 애정은 깊어졌다.

1987-1988 시즌 세리에A에서 첫 득점왕에 오른 마라도나는 이듬해인 1988-1989 시즌 UEFA컵에서 나폴리를 이끌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1990 시즌 나폴리는 또 한번 세리에A 정상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리고…


■론난의 이딸리아 월드컵, 그리고…

이어진 1990년 월드컵에서 아르헨띠나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개막전을 치른다. 1986년 메히꼬 월드컵 우승 이후 더욱 농익은 마라도나의 기량은 아르헨띠나가 2회 련속 우승할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1986년에도 아르헨띠나의 주장이였던 마라도나는 천부적인 실력에 ‘신의 손’으로 꼴을 넣는 행운까지 얻으며 조국에 우승트로피를 안긴 터였다.

때마침 1990년 월드컵은 운명처럼 이딸리아에서 열렸고 아르헨띠나는 천신만고 끝에 4강에 오른다. 완성된 4강 대진표에서 아르헨띠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홈팀 이딸리아를 만나게 된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장소는 다름아닌 나폴리였다. 세계의 이목이 마라도나에게 집중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였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경기를 하루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폴리 팬들을 향해 대담한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 모두가 나폴리 사람들더러 이딸리아인이 되여 국가팀을 응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모습이 당혹스럽다.” 나폴리시민들에게 이딸리아가 아닌 자신을 응원해달라는 요청을 암시하는 발언이였다.

마라도나는 시간이 지난 뒤 ‘영영 용서받지 못할 발언’이라고 인정했는데 그만큼 마라도나에게는 월드컵이 간절했고 나폴리시민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현지언론들은 “많은 나폴리 팬들이 이딸리아와 마라도나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나폴리가 이 시합에서 아르헨띠나를 응원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경기장에서와 달리 이 시합에선 이딸리아의 상대팀에 야유가 쏟아지지 않았고 경기장에 걸린 현수막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입으론 이딸리아를 웨치지만 마음속엔 마라도나 당신이 있다.”


■선수생활의 끝

이 시합에서 아르헨띠나는 승부차기 끝에 이딸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지만 결승전에서는 서독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이딸리아 축구협회가 실시한 도핑테스트에서 마라도나는 코카인 양성 반응을 보였고 무려 15개월 출전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게 된다. 마라도나는 “4강전 앞두고 한 발언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마라도나가 코카인을 즐겼다는 증언은 넘쳐났다. 마라도나는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경기마저 빠지는 등 심각한 사생활 문제로 나폴리 구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2년 화려했던 추억을 남긴 채 나폴리를 떠나게 된다.

이후 세비야를 거쳐 아르헨띠나로 돌아간 마라도나는 뉴웰스 올드보이스와 보카 주니어스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이전과 같은 영화는 없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해 재기를 꿈꿨지만 대회 도중 도핑 테스트에 걸려 대회 도중 아웃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력대 최고의 축구스타였지만 선수 경력의 마무리는 아쉬움 투성이였다.

축구 력사를 빛낸 가장 훌륭하고도 복잡한 인물중 하나인 마라도나, 지난 11월 25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묘지에 그는 간소한 묘비 아래 자신의 부모와 나란히 묻혔다. 

외신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20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