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침략 일본군 헌병의 사죄비

2026-09-28 09:11:53

[도꾜 장춘=신화통신 기자 진택안 리림흔 장박우] “아버지가 중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군마현 요시오까정의 한 묘지에서 79세의 구라하시 아야코가 아버지의 사죄비 앞에 서서 말했다.

구라하시의 아버지인 오사와 유키치는 중국침략 일본군 관동군 헌병부대의 일원으로 천진, 북경, 흑룡강성 동녕시 등지에서 복역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투항할 무렵 오사와는 쏘련군에 포로로 잡혔으나 이후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1986년, 오사와는 병이 중해 사망하기 전 베개 옆에서 쪽지 한장을 꺼냈다. “아버지는 쪽지를 저에게 건네며 ‘내가 죽거든 이 글들을 내 묘비에 새겨달라.’고 말했습니다.” 구라하시는 이렇게 회상했다.

“옛 군대에서 12년 8개월 동안 복역했으며 그중 10년은 중국주재 륙군 하급간부(원 헌병 준위)로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중국침략전쟁에 참가했으며 과거 중국인민에게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죄책감을 느낍니다. 오직 중국인민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구라하시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당시 헌병으로서 중국침략전쟁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며 사죄비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지만 중국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죄비를 세우는 일은 구라하시의 백부와 오빠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가문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도대체 왜 사죄했을가?” 이 질문은 줄곧 구라하시의 마음에 맴돌았다.

의문을 풀기 위해 구라하시는 아버지의 헌병부대 전 동료에게 련락해 아버지의 림종 사죄 유언을 편지로 알리고 아버지의 당시 행적을 알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분은 아버지의 년로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지만 끝내 당시 상황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구라하시의 말이다.

아쉬움을 안고 구라하시는 중국침략전쟁 력사에 관한 학습과 연구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일중 구술력사문화연구회 상무부회장이자 장춘사범대학 특별초빙교수인 리소정을 알게 되였다.

“일본군 헌병은 체포 권한이 매우 컸습니다.” 리소정은 구라하시의 아버지가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죄하고 싶었을 수 있다고 직언했다.

일본메이지학원대학 국제평화연구소 연구원 마쓰노 세이야는 얼마 전 도꾜에서 신화통신 기자에게 “관동군이 설립될 당시 헌병대는 이미 중국에 나타났다. 9.18사변과 7.7사변 발발로 일본의 침략 범위가 계속 확대되면서 헌병대도 중국 각지에 배치되였다.”고 말했다.

마쓰노 세이야는 오래동안 일본 근현대사와 일본군의 중국침략력사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는 수집한 여러 사료를 꺼내 1940년 일본 륙군성 심사를 통과한 <작전요무령>을 펼치고 그 내용을 가리키며 “제7편은 헌병의 임무를 명확히 규정했다. 군기 보호, 간첩 수색, 통신 및 여론 기관 심사 등이 포함되고 소위 ‘적대적 주민’, 즉 일본군에 저항하고 일본군과 협력하지 않는 주민을 진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마쓰노 세이야는 또 관동군 헌병부대 보고서 사본 한부를 꺼냈다. ‘비밀’로 표기된 이 보고서는 한 ‘간첩’에 대한 처분 방안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역리용’(일본측에 전향되여 리용되는 것) 가치가 없으며 ‘특별 이송’할 것을 건의한다는 내용이였다. ‘특별 이송’은 ‘731부대’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731부대’는 대외적으로 ‘일본 관동군 방역급수부’라 불렸으며 제2차세계대전중 대량의 인체실험, 생물전, 세균전 등 악행을 저질렀다.

마쓰노는 “일본의 침략과 점령 과정에서 헌병대는 일본군이 현지 민중을 진압하는 ‘앞잡이’이자 ‘선봉’ 역할을 했다. 그들은 막대한 권력을 가진 매우 무서운 조직이였다.”고 설명했다. 마쓰노는 이어 구라하시의 아버지가 당시 헌병 준위였으며 헌병 준위는 보통 일선에서 부하를 지휘해 각종 임무를 수행했고 일상적으로 항일인사를 수색, 체포, 진압하는 일을 담당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구라하시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성격이 엄격했지만 한번은 TV에서 방영되는 중국침략전쟁 관련 프로그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기억했다. “그때 아버지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한 종류는 죽기 전에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또 다른 종류는 죽을 때가 되여도 굳건히 앞을 똑바로 응시한다고 말했다.” 구라하시는 당시를 회억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분명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구라하시는 아버지의 사죄비를 세워주는 소원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사죄비를 세우는 것을 반대했던 오빠가 사망한 후 구라하시는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동의를 얻었다.

1998년, 구라하시는 가족 묘지 한쪽에 또 다른 비석을 세우고 아버지의 사죄 문구를 완전히 새겼다. 오사와의 유언이 마침내 완성된 셈이다.

구라하시는 이후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사죄의 뜻을 전했다. 그동안 그녀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중국침략 일본군 남경대학살 희생자 기념관, 흑룡강성 동녕시 등을 방문해 일본군 중국침략전쟁에 관한 더 많은 기록을 보았으며 “가는 곳마다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고 감수를 표했다.

한때 일본에서 중학교 교원이였던 구라하시는 일본이 전쟁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일본 학교에서는 일본군이 갔던 일부 장소를 가르치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한 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구라하시는 일본이 침략 력사를 반성할 것을 호소하며 아버지의 사죄 비문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고 ‘신형 군국주의’ 사조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녀는 사죄비가 악의적으로 훼손될 것을 우려해 올해 장춘사범대학에 사죄비 복제품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마음에서도 사라진다.’는 말이 언젠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사죄비가 영원히 훼손되지 않고 이곳에 영원히 서서 력사의 진실을 밝히고 세계 평화를 지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구라하시의 진심 어린 말이다.

来源:延边日报
初审:林洪吉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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