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도 시나브로 떠날 채비를 하며
말없이 짐을 꿍지고 있다
해마다 보내야 하는 옛 님이지만
올해 따라 왜 이다지도 가슴이 먹먹할가
세월의 뒤뜰에서
나이 따먹기를 하던 아이는
나이 타령 부르다가
어느덧 고래희를 훌쩍 넘겨버렸네
곤륜산이 높다한들 세월 고개에 비기랴
조금 조금씩 줄어드는 내 생명이
이제 어느 산정에 기발을 꽂을가?
줄어들지 않는 얄미운 나이를
희망의 끈으로 동여매고
석양을 지팽이 삼아
아리랑 스리랑 노래 부르며
또 한 고개 넘어야 할가부다
인생렬차
신년호 렬차는
시름도 번뇌도 모두
낡은 력사에 부려놓고
거뜬한 차림새로 지평선을 향해
출발의 기적소리 울린다
무엇이 그리도 아쉬운지
을사년의 낮과 밤이 렬을 지어
마지막 작별인사 보내오고
한해 동안 흘렸던 농부의
진한 땀방울은 추억 속에 흘러들어
감미로운 노래로 울려퍼진다
간이역도 종착역도 묻지 마라
구름 안개 헤치며
또 하나의 턴넬 지나
세월에 꿈을 싣고
인생렬차 가는 곳에
얼굴 씻은 해님이
둥둥둥 북 치며 마중 나온다
첫눈
구름이 부서져
푸실 푸실…
올해의 첫눈이
하늘의 문안 안고
나비처럼 날아내린다
을사년의 겨울이
너와 나의
감성의 옷자락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밤눈
밤새 내린 눈이
락엽을 묻어버리고
마을길을 덮어버리고
참새의 발자국마저 지워버렸다
아구리가 무척 큰 함박눈이
시름도 번뇌도 삼켜버렸으니
이런 날엔 실컷
늦잠에라도 빠져보려나
장닭이 우는 소리에
제일먼저 잠을 깬 엄마는
창문을 빠금히 열고
“얘들아, 눈이 왔다!…”
길게 터지는 감탄에
헌 이불 속의 아해들은
하나, 둘… 잠을 털고 일어나
아침해살 밟으며 학교로 간다
설국
긴 꼬리 드리운 흰구름 타고
내 마음은 시간려행 떠난다
눈송이가 펼치는 길의 막끝에
살구꽃 피는 마을이 있고
청노루 얼굴 비낀 박우물이 있고
머리 하얀 어머니가 계신다
눈 오는 날이면 엄마는 노상
흰옷에 무명수건 두르고
정화수 앞에서
자식들의 행운을 빌고 빌었지
아련히 속삭이는 눈발 속에
엄마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끼면
어제의 시간이 살아나
나는 그만 아이가 되고만다
손끝으로 별을 튕기는 벌거숭이 아이가
백초구에 눈이 내린다
눈 속에 묻으리
구겨진 생각과
비대증에 걸린 욕심과
가시 돋친 언어를
죄다 눈 속에 묻으리
나의 빗나간 과거를
눈 속에 묻으리
펑펑 날리는 눈발 속에서
눈과 함께 울다가
추운 하루의 문을 닫으리
해 저문 저녁
그루터기만 남은 허허로운 들판에
눈은 내리여
외로운 촌락을 덮어주는데
구름이 부서지는 저 소리는
내 시린 가슴을 흔드는데…
겨울나무
1
빈 하늘 만지며
상념에 잠겼구나
가진 것 죄다 버리고
야윈 팔 높이 들고
하하 웃는구나
얼음거울에 제 모습 비춰보며
바람의 손을 잡고
말없이 춤을 추는구나
2
추울수록 맑아지는 령혼은
눈보라 속에서 피리를 분다
칼바람의 채찍이 살점을 떼여가도
속마음은 더욱 단단해져간다
폭설에도 흔들림도 없이
새봄을 기다리며
살며시 옷깃을 여민다
3
언제나 대바르고
꼿꼿한 모습을 지니셨다
아무리 가난하고 추워도
항상 마음속에
뜨거운 화로불 안고 사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겨울나무 되여
내 곁에 서 계신다
4
홀랑 벗고 서도
어엿한 저 모습을 보라
삼동 대한에도
얼지 않는 저 령혼이
참 부럽기만 하다
언제면 나도
저 나무처럼 당당할 수 있을가?
5
야윈 가지에
작은 새가 앉아
해살을 쪼아먹는다
겨울 녀신은
추운 행복에
조용히 몸을 떤다
어디선가 날아온 흰 새가
세월을 훔쳐 물고
고개 너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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