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전선의 ‘강철같은 영웅’ 심위

2025-09-23 09:05:20

80여년 전, 기중전장에서 기중통신사(이후 신화사 기중분사) 부사장이였던 심위는 대중들 속에 깊이 심입해 기사를 작성하여 ‘전당 신문 운영’과 ‘대중 신문 운영’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 데 기여했다. 신중국 창건 후 려정조 장군은 친필로 ‘심위 동지의  검소하고 근면한 혁명정신을 따라배우고 보도 사업의 당성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썼다.

심위의 본명은 주홍수이고 강소 오현 유정진(오늘날 강소 소주 유정가두)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우수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가난 때문에 상해에 가 견습공이 되였다. 이후 약 10년 동안 심위는 혁명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아 적극적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했다.

로구교사변이 폭발한 후, 심위는 가족 몰래 연안으로 가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을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9년 초여름, 심위는 팔로군 총정치부 전선 기자단의 일원으로서 기중 항일근거지에 도착하여 《기중도보》 복간 사업에 참여했으며 기중통신사(1942년 3월 신화통신 기중분사로 정식 개칭) 부사장을 맡았다.

립추를 맞은 강소성 소주시 유정가두에서 기자가 73세의 심유생을 만났을 때, 그는 손에 지퍼형 서류 가방을 꽉 쥐고 있었다. 가방을 열자 안에는 누렇게 해진 책자가 있었으며 표지에는 ‘기중 보도전사 심위 동지를 기리는 문집’이라고 적혀있었다. “사촌 큰아버지 심위는 우리 집안의 자랑거리이다.” 이 항일영웅에 대해 말을 꺼내는 심유생의 얼굴에는 경의가 가득했다.

기자는 조심스럽게 문집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심위의 작품, 가족 편지 그리고 심위의 전우, 동료, 가족 등이 쓴 추모사가 수록되여있었다. 1939년 12월에 쓴 한통의 가족 편지에서 심위는 부모님께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라를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구하고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고 알려주었다.

근 4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심위는 개인의 안위를 무릅쓰고 많은 소식, 통신, 보고 문학 및 전쟁시의 창작을 통해 기중 인민의 항일투쟁 력사의 기록자가 되였다.

“갑자기 모두들 패장을 따라 나무 울타리를 훌쩍 뛰여넘어 앞으로 돌진했고 수류탄이 짐승의 입을 겨누었다. 찬바람이 쏜살같이 달려가고 승리의 미소가 자홍색 얼굴에 피여올랐다.” 1939년 《팔로군 군정 잡지》 제6호에 실린 <설야의 습격>은 한 팔로군 문예선전대가 야밤에 평지천 남쪽 30리 소집 역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둔 장면을 반영했다.

‘살인의 목적’, ‘산 사람을 짐승으로 여겨’, ‘늑대의 마음으로 혹형 실시’… 심위가 1941년 《기중도보》에 발표한 <누가 견딜 수 있을가>라는 글은 피와 눈물을 머금고 중국침략 일본군이 우리 동포를 학살한 수많은 범죄를 폭로했다.

열정적인 보도들이 현지 군민들의 항일 애국 열정을 크게 고무하고 격려했다.

1942년 5월부터 일본군은 기중지역을 미친 듯이 소탕하기 시작했다. 심위는 적진의 후방에 있으면서 여러차례 위험에 처했다. 어느 날, 심위와 수십명의 대중들이 현성으로 끌려가 로동자로 되였다. 자신의 말투가 신분을 쉽게 드러내기 때문에 그는 적들 앞에서 멍청한 척했고 이후 당조직의 적극적인 구출로 적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7월의 어느 날, 심위는 부대와 함께 이동하던중 갑자기 적에게 포위되여 불행히도 장렬히 전사했으며 당시 나이는 26세가 되지 않았다.

“신중국이 창건 후, 신문을 통해 사람을 찾고 나서야 가족들은 큰아버지가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알게 되였다.” 심유생은 슬픔에 젖어 당시 큰아버지의 기자증만 찾았다고 말했다.

기중이라는 이 땅에서 피투성이가 된 사진과 기자증은 심위가 남긴 마직막 물건이였다.

“당신은 강철같은 영웅이다! 당신을 위해 복수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복수하며 끝까지 항전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다!” 전우들이 일본군의 칼에 참사했을 때, 심위는 슬픔을 힘으로 바꾸어 <복수의 노래>를 썼고 기중 군민들은 이를 전해 불렀다. 그 자신도 역시 보도전선의 강철같은 영웅이였다.

심위는 이미 희생되였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히 남겨졌다.

“사촌 큰아버지의 정신은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두 녀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의료사업일군이 되였고 셋째 남동생은 군인이 되여 나라를 지키고 있다.” 중학교 어문 교원으로 거의 20년 동안 일한 적이 있는 심유생은 감탄하며 “나는 평생 정직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학생들 앞에서 항상 떳떳했다.”라고 말했다.

희생된 지 8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영웅은 잊혀지지 않았다.

심위가 다녔던 유정실험소학교는 그를 우수한 교우로 선정하고 그의 사적을 선전하여 전교생에게 혁명전통교양을 실시했으며 《유정진지》에는 심위의 생애가 상세히 기록되여있고 유정공식공중계정은 비정기적으로 선렬을 기리는 글을 발표했으며 기중평원, 하북 형수 요양 요읍 고성의 기중도보 전시관에는 심위의 원고를 실은 귀중한 신문, 유등이 진렬되여있어 참관자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홍색기억을 되새기게 했다.

2019년 개관 이래 기중도보 전시관은 이미 현지에서 홍색유전자를 전승하는 중요한 진지로 되였다. 관장 위지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관해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홍색 전형 사적 전승’ 실천활동을 정기적으로 진행해왔으며 지금까지 연 2만명의 참관자를 맞이했다. 앞으로 전시 방식을 혁신하여 위대한 항전정신을 대대로 전수하겠다.

  신화사 기자 주정 임려영

来源:延边日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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