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장단, 신명의 길 우에서 30년을 걷다

2023-09-01 09:16:48

"그가 30여년 외길을 걸어오며 지켜온 농악 장단은 오늘 우리가 보듬어야 할 무형문화유산으로 우뚝 되살아났다"


주급무형문화유산 농악 장단 대표 전승인인 진경수(57세)는 평범하지 않은 무서운 집중력을 가졌다. 북, 장고, 꽹과리, 징 그 어떤 악기라도 손에 쥐여지면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가 왜 예술인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가락의 흥이 그의 몸에서 절로 뿜어져나왔다. 몇시간을 두드리고 뛰고 뱅글뱅글 돌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농악장단에 미쳐 살았습니다. 이것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줘본 적이 없습니다. 예술인 인생 한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그는 시종 유쾌한 어조로 얼음에 박 밀듯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지루한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희로애락이 고루 담겨있는 그의 농악장단 인생 서사를 전하며 흥겨운 장단과 춤사위를 곁들여 굴곡의 률동을 만들었다. 그가 30여년 외길을 걸어오며 지켜온 농악 장단은 오늘 우리가 보듬어야 할 무형문화유산으로 우뚝 되살아났다.

그는 혹여라도 감을 잃을가 로심초사하며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지 않는다. 하루종일 연습실에 머물 때도 많다. 쉬지 않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연습에 연습을 더한다.

힘찼던 젊은 시절의 박력감은 조금은 무뎌졌을지 모르지만 그 자리는 농악 장단에 대한 일층 성숙된 재해석으로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농악장단은 지금이 소리 본질의 움직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더욱 밀도 있게 완성되여가고 있었다.

30년을 넘게 국내외를 누비며 공연을 하고 기술을 전수하면서 꽹과리, 징, 장고, 북이 지금처럼 보급이 되는 데 앞장서온 진경수는 경력도 화려하다.

북, 장고, 꽹과리, 징 그 어떤 악기라도 손에 쥐여지면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국가1급연주자인 그는 중국타악학회 리사, 길림타악협회 리사로 지내고 있으며 국가문화부 우수상, 길림성 제3회 소년아동예술대회 우수 지도자상, 연길시 10대 우수청년, 전국 소수민족문예공연 우수프로젝트상, 한국 세계사물놀이 대회 외국인 부문 일등상, 산서 태원 ‘최고 북 연주자 초청경기’ 최고 연주자상, 길림성 민족민간음악무용대회 1등상 등 영예를 받아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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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향항 제14회 아시아예술축제 무대에 올랐고 2000년 연길 중국조선족 민속관광박람회에서 타악 창작, 지도 및 대북 연주자로 나섰으며 2002년에는 자치주 창립 50돐 기념 대형 광장무 타악종목을 창작, 지도하고 연주자로 무대에 올랐다. 2011년에는 북경인민대회당에서 무형문화유산 공연으로 무대를 장식했고 2012년 자치주 창립 60돐 기념 대형 광장무 제4장 집행감독을 맡았다. 2014년 연변군중예술관에서 조직한 동북 3성 조선족문화관 농악무 양성반에서 장고 장단 교학을 진행했으며 2015년에 중국가극무극원의 초청으로 북경국가대극원에서 문화부 공연시즌 활동중 하나인 ‘민족음악회’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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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공연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무대로 진경수는 2006년 대형 음악무용서사시 <천년 아리랑>으로 최고상을 수상했던 제3회 전국 소수민족문예공연을 꼽았다. 당시 <천년 아리랑>의 대미를 장식한 건 진경수의 연주였다. 99개의 북이 3면으로 두른 가운데 모듬북이 놓여있었다. 진경수는 북채로 3분 동안 내내 모듬북을 두드렸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듯한 웅장한 북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 순간 관객들의 혼을 뺏아버렸다. 그날 그는 명불허전의 무대를 보여주며 농악장단이 들려주는 소시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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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날의 연주에서 전해졌던 진하고 뜨거운 땀과 열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만족에만 그치면 안됩니다. 연주자는 우리 농악 장단의 정서를 섬세하고도 강렬하게 표출해야 되고 그걸 관객이 오롯이 느껴야만 때에야만 비로소 진정한 연주자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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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져있는 사물놀이도 진경수가 1991년에 팀원 몇몇과 힘을 모아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작해 전국 곳곳에 전파하면서 보급해왔다. 함께 농악 장단을 고집했던 이들 대부분이 떠나거나 세대교체가 됐지만 진경수만은 오로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지금도 농악 장단의 버팀목이 되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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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 지금까지 일생에 거쳐 농악 장단의 대중화에 대해 고민한 예술인으로 평가되는 진경수는 공연을 위해 걸어서 이동하던 어려웠던 시절부터 변화하는 시대를 느끼며 수많은 공연을 해왔다. 먹고 사는 게 당장의 문제였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배웠던 실기 뿐만 아니라 예술인의 기본정신이 그때 몸에 각인이 되였다. 그 버팀목으로 지금도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후학 양성에서 그의 욕심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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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음악학원 민족음악연구소와 타악전문연구실의 초청으로 조선족 타악 교수를 하고 2000년부터 17년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2010년부터 지금까지 연변인민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프로그램에서 농악 장단 전문강좌를 진행하면서 우리 가락의 보급에 앞장서왔다. 심양음악학원, 중앙민족대학 학생을 상대로 농악장단 지도를 맡기도 했다. 연길과 화룡에 농악 장단의 전승기지를 만들었고 길림성문화관에 ‘진경수교학훈련기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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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통예술을 하는 다음 세대가 대우를 받을 수 있게끔 토양을 가꾸는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전통악기를 메고 활개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겁니다. 그런 시대가 와야 된다고 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전통’이라는 정서가 사라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이제 그는 력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전통문화, 전통예술의 보급을 위해 농악장단을 견지하고 있었다.

배속에서부터 아버지의 음악을 듣고 자란 진경수의 아들 진위도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농악장단에 인생을 걷고 있다. 물론 진경수의 선택을 가족 전부가 반길리 없었다. 하지만 반대는 농악 장단의 대를 이으려는 그의 열망만 부추겼다. 아들 진위에게 아버지 진경수는 친구였고 스승이였고 파트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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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황이 많이 바뀌였지만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을 해야 하고 우리 민족의 신명과 그 기운을 생활문화로 다시 한번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제 진경수의 바람이다.

그 다음 단계로 진경수는 리론화 작업을 시작했다. 30여년 해왔던 것을 정리하면서 전문서적 집필을 준비중에 있다.

우리 민족의 신명과 기운을 되살리기 위한 그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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