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죽 한장’의 전설을 품고 있는 룡정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

2023-11-27 09:27:31

지금은 룡정시의 랜드마크가 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은 당시 시커먼 철문 안으로 끌려갔던 항일투사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였다.


룡정시 륙도하로에 위치하고 있는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홍색관광명소이다. 길림성은 이 건물을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유형의 건축물로 보호하고 있다.

지금은 룡정시의 랜드마크가 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은 당시 시커먼 철문 안으로 끌려갔던 항일투사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중국 침략의 발판이였던 셈이다.


1909년에 일본은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편, 확장했다. 무력으로 통치하고 나아가 중국 전역으로 공세를 펼치기 위함이였다. 외벽 네 귀퉁이에는 두터운 콩크리트로 설계한 엄페 진지가 련쇄적으로 설치되여있다. 항일투사의 기습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담장의 높이는 2메터를 훌쩍 넘기는데 벽달 담장에 옹위되여있는 건축물이 바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이다. 1922년 11월, 항일투사들에 의해 불태워진 이래 1924년에 다시 착공하여 1926년에 준공됐다. 건축면적은 3835평방메터이며 관사 및 정원을 포함하여 담장으로 둘러쌓여있는 전체 부지는 5만 7751.94평방메터이다. 건물은 지하 1층을 더해 3층으로 구성되여있고 중간 부분은 5층으로 돌출되여 있다. 정면 중앙에는 세개의 아치형 출입구로 꾸민 현관이 있다.


상상조차 힘든 아픈 력사가 있는 만큼 내려져오는 전설도 있다. ‘소가죽 한장’이란 제목으로 기록도 되여있는 전설인데 풀어보면 이렇다.

“일제가 룡정에 령사관을 건립하려 했다. 헌데 일제는 령사관의 규모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었다. 이에 일본 령사가 간교한 술책을 꾸몄다. 그리고는 국자가에서 청나라의 윤대인을 접견했다. 일본  령사는 일본과 청나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돈독해야 함을 강조하며 일본에서 건너오는 령사들이 머물 데가 필요하다고 윤대인에게 청했다. 이에 윤대인이 령사관의 건립규모를 묻자 일본 령사는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 사람들이라 욕심부릴 줄 모릅니다. 그저 소가죽 한장 만큼의 자리를 떼여주시면 족합니다.’라고 했다. 윤대인은 일본 령사의 말을 의심했다. 윤대인은 ‘소국놈은 소국놈이구나.’라고 속으로 비웃으며 허락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으리으리한 령사관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높다란 담장을 빙 둘렀고 그 속에서 견고한 일본식 건물을 다듬고 있었다. 윤대인은 일본 령사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일본 령사는 ‘시장에서 소 한마리를 사다가 그걸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오려내여 령사관의 둘레를 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윤대인은 일본 령사에게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허락한 것이라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룡정에 버젓한 간도일본총령사관이 들어앉게 됐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그 뼈대가 여전히 온전한데 그것을 증거물로 해서 그 옛적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보수작업을 거친 1층 전시구역은 정치면, 경제면, 문화면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전방위적이고 야만적인 파쑈통치를 적라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이 깔려있어 암흑했던 그 시절에 부합되는 듯싶었다.


머루알 같은 두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녀자아이의 그림을 지나 일절의 빛도 없는 방에 들어섰다. 지나치게 캄캄한 곳이라 잘못 들어섰나 싶었을 때 인기척이 감지됐는지 스크린이 밝아지면서 카운트다운에 들어섰다.


영상상영실로 사용중인 이 방에서는 1894년에 발발한 갑오중일전쟁 관련 자료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과 이웃한 연변지역에서 이른바 ‘간도문제’를 일으켰다는 침략의 발단부터 소개되고 있었다.


아울러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일어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밀랍조형물로 재현했는데 배합음성도 방송되고 있어 참관 뒤에도 한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밀랍조형물을 지나서는 생존자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담겨진 화면 앞으로는 수화기가 놓여져있다. 직접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수화기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새로 조성된 2층 전시구역은 시간 순서에 따라 6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1907년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립돼서부터 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기까지의 연변인민항일투쟁사가 사진, 문자, 문물 등을 통해 소상히 전시돼있어 전시범위와 내용 면에서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졌다.


지하실은 북쪽 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는데 이곳에서 항일투사들을 취조하고 고문했다. 1909년부터 1937년까지 약 2만여명의 항일투사들이 취조를 당했으며 이중 4000여명이 고문을 당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만주사변 이후 경찰부 산하에 특별수사반을 신설하고 다양한 첩보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차단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간도특별공작반으로 력량을 강화했다. 례컨대 1934년 한해에만 3635명이 간도특별공작반에서 취조를 당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중국 침략의 발판이였던 셈이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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