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시 계주구 반산의 암석에는 많은 항일표어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는 왕소기가 당년에 당지 군민을 인솔하여 이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견지한 흔적이다.
왕소기는 본명이 왕육곤이고 자가 계여이며 1912년 하북성 향하현에서 태여났다. 1926년, 그는 하북성 립통현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재학기간 늘 진보서적을 읽고 항일선전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5년, 왕소기는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가입했고 1936년 3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왕소기는 당조직의 파견으로 계현(오늘의 천진시 계주구)에서 항일구조사업을 전개했다. 왕소기는 모든 저축을 꺼내 진료소를 차리고 매일 약상자를 메고 군중들을 진찰하면서 항일구국 선전을 진행했다. 반년여 만에 그는 대량의 항일구국회 회원을 발전시켰으며 판교진 주변의 20여개 마을에 항일구국회 조직을 건립했다.
중국공산당 계현위원회가 설립된 후 왕소기는 현당위 위원, 계현항일구국총회 선전부장 등 직무를 맡았다.
반산은 적들이 소탕하는 중점지역이다. 당시 계(현)보(하)삼(하) 련합현 현장이였던 왕소기는 반산련합촌민군을 조직하고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작전했다. 일본군이 소탕을 감행하자 그는 군중들을 조직하여 함께 산굴에 숨고 산골짜기에서 날을 지새웠다. 그는 대원들에게 “혁명투쟁을 하려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생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 당의 비밀을 어느 때든 루설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1943년말, 왕소기는 기동군구 위생부 부장 겸 정치위원으로 전근했다. 부대 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위생훈련반을 조직하고 북평, 향하 등지에 은밀히 잠입해 자금과 약품, 의료기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왕소기와 전우들의 끈질긴 노력은 군구 위생사업의 토대를 닦아놓았다.” 천진시 반산렬사릉원 주임 정휘는 이렇게 말했다.
1944년 10월 17일, 풍윤현 양가포에서 구당위 확대회의에 참가하던 왕소기는 여러갈래의 일본군과 괴뢰군들에게 포위되였다. 왕소기는 완강하게 적의 화력망을 뚫었으나 전우가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과단성 있게 돌아와 전우를 보호하다가 불행하게도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당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간신히 몸을 지탱한 그는 몸에 지니고 있던 서류를 불태운 뒤 계속 적을 향해 사격했고 마지막 총알을 자신에게 남겼다.
매년 청명절이 되면 왕소기의 손자 왕계렬은 자식들을 데리고 반산렬사릉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소기의 묘비 앞에서 그해에 이룩한 새로운 성과를 보고한다. “할아버지부터 우리 집안 4대는 모두 공산당원이다. 이 붉은 유전자는 줄곧 나를 격려해왔다. 나는 이후에도 우리에게 속하는 책임을 지고 이 붉은 가풍을 잘 전승할 것이다.” 왕계렬은 이렇게 말했다.
신화사 기자 윤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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