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모욕할 수 없고 이 몸은 굽힐 수 있지만 꺾을 수는 없다.” 6월 30일, 항일장령 진중주의 사적을 각색해 만든 회극 《포연을 불태우다》가 그의 고향인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에서 상영됐다. 이 극은 진중주의 안해가 일본군에게 남편의 머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진중주의 용감하고 비장한 항전력사를 복원했다.

1941년 6월 5일, 일본군과 괴뢰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국민당 로소환변구 유격총지휘부에 대한 ‘소탕’을 감행했다. 진중주가 인솔하는 제4종대는 적들의 공세가 맹렬하여 제때에 이동하지 못하게 되였다. 진중주가 부대를 이끌고 흥화일대로 퇴각할 때 일본군과 괴뢰군에게 포위되였으며 전투에서 그는 몸에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나이가 35세였다.
진중주가 희생된 후 일본군은 그의 머리를 베서 태주 일본군사령부에 넘겨 공을 청했다. 진중주의 부인 왕지방은 당시 임신이였는데 남편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참지 못했다. 왕지방은 당지 촌민들의 도움으로 밤도와 배를 타고 태주 일본군사령부로 가 남편의 머리를 돌려받아 장례를 지냈다.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진중주는 당시 국민정부에 의해 중장 계급으로 추서되였으며 1987년 강소성인민정부의 비준을 거쳐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같은 해, 염성시인민정부는 진중주 렬사 묘를 태주에서 염성시렬사릉원으로 옮겼다. 2014년 9월, 진중주는 민정부가 발표한 첫번째 300명 항일 영웅렬사와 영웅군체 명부에 선정되였다.
머리를 던지고 뜨거운 피를 뿌린 진중주는 당지 대중들로부터 ‘단두장군’으로 불리웠다. 중국혁명과 항전사업을 위해 몸을 바친 그는 국공 합작항일 주장의 적극적인 선전자이고 실천자였다.
1906년 10월, 진중주는 건호현 초언구향 언동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공산주의자, 혁명렬사 조경지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다. 진중주의 집은 비교적 빈곤하여 조경지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925년, 진중주는 상해전차회사에 와 근무했으며 1927년 북벌군이 강소에 진입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당지부와 농민회조직의 설립 준비에 참여하여 지방의 토호렬신과 투쟁했다. 대혁명 실패 후, 그는 남경에 가 강소성경찰학교에 입학했다가 후에 남경군관연구반에서 학습했는데 소속은 황포군관학교 제6기로서 졸업 후 국립 중앙대학, 천진 북녕철도, 강소 진포철도 등에서 근무했다.
1937년, 전 민족 항전이 발발한 후 진중주는 당시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전지특수단 제3총대 소장단장으로 위임되여 조경지와 함께 대아장전역에 참가했다. 1938년말, 진중주는 로소환변구 유격총지휘부 제4종대 소장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소북에서 항일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군대의 문화선전을 매우 중시했으며 부대에서 정치사업대를 조직하고 《전지신문》, 《신군보》 등을 편집, 출판했으며 당지 중학교의 사생들을 조직하여 연극과 노래를 부르게 하고 국공 량당의 협력 항일을 선전했다. 1939년 가을, 그는 부대를 인솔하여 강소성 태주에 진주하여 신사군과 협력해 일본군과 유격전을 진행했으며 일본군의 모터뽀트 2척을 매복 습격해 격침시켰다.
진중주의 순국 사적은 그의 고향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매년 9월 개학날이면 진중주의 이름을 딴 초언구 중주초급중학교 학생들은 교수청사 앞에 우뚝 솟아있는 진중주의 반신 조각상에 경례를 드리고 ‘진중주 사료 진렬실’을 참관한다. 중주초급중학교 교장 안학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중주 렬사의 애국장거는 학생들이 분발하도록 격려했다. 우리 학교는 진중주 렬사의 사적을 교본에 써넣었으며 매년 품행과 학업이 모두 우수한 학생에게 진중주, 왕지방 부부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지급한다.
건호현회극단 단장 선문감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건호는 회극의 발원지로서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돐에 즈음하여 지방극 방식으로 대중에게 친근감 있는 진중주의 인물형상을 보여주고 전쟁의 잔혹한 본질을 폭로하며 평화에 대한 영원한 기원을 전달했다.
신화사 기자 정생죽 구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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