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유방시 림구현 동성가두 두가와촌에서 ‘무림장군(武林将军)’ 두래경의 항일사적은 가가호호에 알려졌을뿐더러 《림구현지》에도 기록되여있다. 두래경의 유골은 장엄하고 엄숙한 림구렬사릉원에 안장되였는데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아 렬사를 추모하고 있다. 그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정신은 대대로 이몽로혁명근거지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무림장군’ 두래경의 일생은 전설적이다. 두래경은 자가 봉산이며 1900년 두가와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릴때부터 무술을 련마했으며 19살에 제남1중학교에 입학했고 그해에 산동성무술전습소에 전입하여 공부했으며 졸업 후 림구현고등소학교 국술교원으로 있었다. 후에 진강에 가 강소성립 제9사범 국술교원으로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남경 중앙보건사에 임직했다. 그 사이에 두래경은 전국 무술시험에서 일등을 따냈다.

1931년, 그는 제남 민중체육관 관장으로 있었으며 이듬해에 산동성국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1935년에는 ‘지성국술연구사’를 주최했고 제남1중과 제로대학의 무술교원도 겸임했다.
7.7사변 후, 두래경은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사령부 경비무사대 대장으로 있었다. 같은 해 10월, 제남이 함락되고 무사대는 국민군의용대로 개편되였고 그는 대장을 맡고 120명을 거느리고 림구에 왔다. 그 후 많은 애국인사들이 두래경의 호매로운 성품을 흠모하여 분분히 의용대에 가입했는데 인원은 2000여명까지 확충되였다.
두래경의 생애를 40여년간 연구한 원 림구현문화국 퇴직간부 풍익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의 혼란한 세월에도 두래경은 대오를 이끌고 일본군과 용감하게 전투를 벌리면서 비장한 투쟁력사를 써냈다.
1938년 1월, 일본군은 림구를 침공했다. 4월 12일, 두래경은 부대를 인솔하여 30여명의 일본군, 50여명의 괴뢰군과 두시간 남짓이 격전을 벌려 림구를 수복했다. 같은 해 5월 24일, 800여명의 일본군과 3000여명의 괴뢰군이 비행기, 대포의 엄호하에 림구를 침범하자 두래경은 부대를 이끌고 완강히 수비했다. 현저한 병력 차이로 의용대는 포위를 뚫고 후퇴했으며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휘관 1명과 일본군, 괴뢰군 70여명을 사살했다. 1938년 가을, 국민군의용대는 산동성 보안대 제17려로 개편되였으며 두래경이 려장을 맡았다.
림구현당위 당사연구중심 주임 장효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래경은 무예가 뛰여났으며 나라를 위해 무예를 익히고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공 합작’, ‘총부리는 적을 향한다’, ‘중국인과 중국인은 싸우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공산당원 마보삼이 령도하는 부대와 련계를 유지하고 중국공산당 지하당원 임명검을 엄호했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두래경은 17려 장병들을 인솔하여 일본군, 괴뢰군의 거점을 습격하고 적들의 철도운수선을 파괴했으며 적군 식량수송대를 요격하고 20여차례 전투를 벌려 일본침략자에게 엄중한 타격을 안겼다.
1942년 7월 18일, 극악무도한 일본군은 10개 현의 일본군과 괴뢰군 3000여명을 집결시켜 17려를 포위했다. 두래경은 소식을 접하자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연구했다. 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의 주력을 피하고 잠시 전이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부대에 진지를 굳게 지키며 일본군과 결전을 벌릴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7월 19일 새벽, 일본군과 괴뢰군은 여러차례 진공을 감행했고 두래경은 부대를 인솔하여 견결히 저항했다. 오후 4시까지 치렬한 전투를 벌린 결과 17려는 1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두래경도 총상을 입었다. 두래경은 포로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장렬하게 자결하여 순국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당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두래경에게 륙군 소장을 추서했다. 1988년, 산동성인민정부는 두래경을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두래경의 항일사적은 림구현에 널리 알려져있다. 림구현 룡강소학교 교원 주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래경 렬사의 이야기는 혁명선대들의 열혈과 분투를 담고 있으며 우리의 귀중한 정신적 재부이다. 영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오늘의 행복한 생활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사회의 동량으로 성장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신화사 기자 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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