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성 해동시 민화회족투족자치현 렬사릉원에서 시민 송녀사는 력사사진과 문자소개를 통해 항일영렬 마등운의 사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늘의 행복한 생활은 혁명선렬들이 피를 흘리고 생명으로 수호한 것이다. 마등운은 우리 고향의 자랑이다.” 마등운은 1906년 지금의 청해성 민화현 고선진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으며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성인이 되여 보국의 리상을 품고 붓을 버리고 종군하여 선후하여 로산군관훈련단과 보병학교 교관반을 졸업했다. 전 민족 항전이 폭발한 후 마등운은 전장을 누비면서 부대를 따라 강서 수수, 호북 통성 등 전역에 참가했으며 전투에서 용감하기로 소문났다.

1938년 5월, 일본군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무한을 공략하려 시도했다. 마등운은 명령을 받고 부대를 거느리고 마당요새를 보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당요새는 강서 팽택현 경내에 위치해있으며 장강 방어선의 중요한 군사요새로서 지리적 위치가 아주 중요했다. 일본군은 강렬한 포화로 맹공을 퍼부었고 아군 전사들은 마등운의 인솔 하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면서 일본군과 밤낮으로 혈전을 벌렸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제3차 장사회전을 발동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장사를 대거 진공했다. 1942년 1월초, 일본군은 장사를 포위 공격하는 전투에서 패배했고 당시 국민당 제79군 98사 293퇀 퇀장이였던 마등운은 명령을 받고 포병을 지휘하여 제292퇀을 협조하여 류양하 동안의 후가충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제292퇀 퇀장, 부퇀장이 전투 지휘시 중상을 입자 마등운은 명령을 받고 292퇀 대리퇀장을 겸임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마등운이 부대를 인솔하여 일본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는 과정에서 그는 몸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서있기조차 어려웠지만 그는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담가에 누워서 두 퇀의 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에 맹공을 퍼부었다.
전사들은 그의 지휘하에 사기 충천하여 적군 진지를 돌파한 후 후가충, 려가평 등 일본군 거점을 속속 수복했다. 마등운은 또 부대를 지휘하여 류양하를 건너 랑리시를 공략하고 이튿날 승승장구하여 고교를 수복했다. 일본군이 비행기 엄호하에 황급히 철수하자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로도하 이북까지 추격했다. 전쟁 후, 군부는 마등운에게 큰공 1차를 기입했다.
1944년, 일본군은 장사를 습격한 후 형양을 공격했다. 8월, 마등운은 부대를 인솔하여 형양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신녕에서 우군이 포위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를 인솔하여 포위를 뚫으러 달려갔다. 부대는 백사 부근에서 일본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격전 끝에 마등운은 불행하게 총탄에 맞아 영용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항일전쟁에서 마등운과 같은 영웅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마등운의 외손자 왕춘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나는 외할아버지 관련 력사자료를 수집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혁명영렬의 영웅사적을 료해하고 혁명선대의 정신력을 전승하길 바란다.
해동시 민화현 퇴역군인봉사중심 주임 모길강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최근년간 당지에서는 영렬사적을 정리하고 렬사릉원 등 홍색교양기지의 전시내용을 제때에 보충, 보완한 동시에 혁명선렬을 추모하고 홍색유전자 전승을 주제로 한 홍색문화를 고양하고 있다. 우리는 영웅을 흠모하고 영웅을 따라배우는 농후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전사회에 영웅을 숭상하고 선렬을 추모하는 량호한 기풍을 수립하고 있다.
신화사 기자 장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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