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서남쪽 깊은 곳는 거센 물결 굽이치고 천길 벼랑이 솟았는데 방산, 래수, 탁주 세곳이 이곳에서 린접한다. 80여년 전 평서항일근거지의 간부와 군중들은 이 높은 산과 격류 속에서 투쟁했다.
1944년,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 중국공산당 방산, 래수, 탁주 련합현 7구 당위 서기 진요신이 적에게 체포되였다. 진요신을 압송하는 20여리의 길에서 적들은 납사줄을 그의 쇄골에 꿰고 끌고 갔다. 진요신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공산당 만세!”를 웨쳤고 희생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8세였다.
2015년, 진요신은 민정부 제2진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부에 입선되였다.
산골짜기 속의 래보로를 따라 태항산맥의 틈새로 들어가면 포와촌이 보인다. 산세를 따라 지은 골목길에는 여러번의 보수를 거친 낡은 주택이 산비탈에 위치해있다. 1916년에 진요신이 바로 이곳에서 태여났다.
진요신의 외손자 류전신은 비록 진요신과 만난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외할머니로부터 “외할아버지는 서당을 다녔고 일정한 문화가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소송에서 이긴 적도 있다. 외할아버지는 앞장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했다.”는 말을 들었다. 1939년, 진요신은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부터 혁명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진요신의 혁명 발자취는 방산, 량향 련합현 3구, 7구, 1구, 방산, 래수, 탁주 련합현 9구, 7구 등 광범한 지역에 퍼졌다. 구당위 서기 등 직무를 맡고 있는 기간에 그는 적극적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산골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도 자신의 항일조직이 있게 했다.
시국이 불안정하고 험악한 산에서 당의 사업을 어떻게 전개하며 항일통일전선이 어떻게 강대해질가?
진요신은 방산, 량향 련합현 3구에서 촌간부회의, 신사회, 지식인 좌담회를 열어 애국지사, 개명신사, 지식인들을 단결시켰고 농민항일구국회, 녀성항일구국회, 청년자위대 등 조직을 설립했다. 방산, 량향 련합현 7구에서 진요신은 대중을 동원하여 소작료와 리자를 절감시키고 참군시키며 량곡과 자금을 모으는 등 활동을 펼쳐 항일을 지원했다.
그러나 1940년 ‘방산, 량향 1구 사변’이 발생하여 반란군과 당내 불량분자들이 결합하고 일본군과 내통하면서 40여명의 당정 간부가 체포되고 20명이 살해되였다.
사변이 발생한 후 진요신은 방산, 량향 련합현 1구에 전근되여 사업을 전개했다. 진요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깊은 삼림 속에서 일본군과 류동작전을 벌리고 각 마을에서 반역자를 경계하고 소멸시켰다. 그는 긴밀히 대중들에게 의지하여 청년 열성자를 엄격히 양성하여 100여명의 청년당원을 발전시켰으며 15개 촌에 당조직과 촌공사소를 다시 건립했다. 그의 헌신적인 전투 업적으로 진요신은 진찰기변구로부터 ‘항일영웅’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일본 괴뢰군은 그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1941년 6월, 방산, 량향 련합현과 래수, 탁주 련합현이 통합되여 방산, 래수, 탁주 련합현이 되였다. 1943년 10월, 진요신은 중국공산당 방산, 래수, 탁주 련합현 7구 구당위 서기 직무를 맡았다. 7구는 깊은 산악지대의 요충지로서 적군의 잔혹한 ‘소멸전’을 겪은 후 적군의 일시적 기지로 점령되였다.
1944년 4월, 반역자의 밀고로 적들은 진요신의 주둔지를 포위하였다. 진요신은 정가마촌의 다리 우에서 권총을 부수고 문건을 찢어 강에 던진 후 결국 적들에게 잡혔다. 납사로 뼈를 꿰뚫고 끓는 물을 몸에 부으며 총검으로 눈을 찔렀으나 진요신은 강철 같은 의지로 고통을 꿋꿋이 이겨내고 장렬히 순국했다.
포와촌의 옛집은 다시는 주인을 맞이하지 못했다. 《포와촌촌지》의 기록에 따르면 항일전쟁 승리 전후에 이곳은 병기공장의 지뢰부로 되여 계속 당의 혁명투쟁을 지지했다. 현재 이 병기공장 옛터는 방산구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고 이곳은 혁명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로 되였다.
2000년, 방산구 관련 부문에서는 십도진에 있는 평서항일전쟁기념관 뒤산 우에 평서항일렬사묘지를 세웠다. 해마다 청명절이면 류전신은 가족들을 데리고 렬사묘지에 가 외할아버지를 추모하군 한다.
진요신 뿐만 아니라 이 묘지에는 100명의 항일렬사가 영원히 잠들어있다. 산기슭에서 포와촌 방향에서 흘러나온 시내물이 거마하로 모여들어 큰 굽이를 돌아 평원과 바다로 흘러간다.
신화사 기자 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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