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 계림시 칠성관광지 보타산 박망평에 들어서면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들이 장엄하고 숙연한 항일전쟁유적지군, 즉 3장군 순직 기념탑과 800장사 묘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는 1944년 계림보위전에서 장렬히 순국한 국민혁명군 3명의 고위급 장령과 800여명의 병사들이 영면하면서 80여년 전 10여일간 지속된 계림보위전을 말해주고 있다.
진제환 렬사가 바로 이 3명 장군중의 한 사람이다.

진제환은 1893년생으로 광서 잠계 사람이며 광서 수정공서 고급참모 등을 지냈다. 젊었을 때 그는 손중산 선생의 민주혁명사상 영향을 받아 혁명조직 ‘동맹회’에 가입했고 신해혁명시기에는 청정부를 뒤엎는 투쟁에 참가했다.
1944년 5월,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주력을 집결하여 예상계전역을 일으켰고 락양, 장사가 잇달아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형양도 8월 8일 함락되였다. 이어 일본군은 상계철도를 따라 장구로 남하하면서 계림으로 다가왔다.
제16집단군은 계림을 사수하고 일본군의 전진을 저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제16집단군 부총사령관 겸 계림 성방사령관이였던 위운송은 진제환에게 참모장을 맡기려 했다. 마침 진제환의 안해가 곧 출산하게 되였는데 친척들은 그에게 재삼 고려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진제환은 가서 한통을 남기고 즉시 계림으로 달려갔다.
진제환은 계림 성방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2만 5000여명의 병사들과 함께 계림 수비를 맡았다. 진제환은 이번 전투가 아주 격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운송과 협동하여 전투구역을 획분하고 여러 부대에 대한 보장조치를 명확히 했다. 그는 전투임무에 근거해 많은 식량과 탄약을 보충하고 방위공사구축위원회를 설립했으며 군민을 동원하여 계림의 지형을 리용한 견고한 야전공사를 건설하고 통신련락망을 한층 더 소통시켰다.
1944년 10월 28일, 일본군은 7만여명의 병력을 집결하여 계림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29일부터 전면 진공을 시작했다. 장병들은 위운송, 진제환의 지휘하에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고 계림 교외에 동굴이 많은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진지를 지켰다. 11월 4일 새벽부터 일본군은 가스탄, 연소탄, 화염방사기 등 화학무기를 공공연히 사용했고 비행기와 대포를 동원하여 폭격을 가했다. 쌍방은 격렬한 교전을 벌렸으며 아군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11월 9일, 일본군은 대량의 병력을 집결하여 재차 계림을 진공했으며 쌍방은 치렬한 시가전으로 돌입했다. 진제환은 장병들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병력 부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운송과 진제환이 부대를 이끌고 적들의 겹겹한 포위망을 뚫고 후산에 도착했을 때 또 일본군과 조우하게 되였다. 이때 진제환은 중상을 입어 부대를 따라 포위를 돌파할 수 없게 되였으며 그는 자결하여 치욕을 면하기로 결정했다는 유서를 경호원에게 넘겨준 뒤 포위를 돌파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최후의 순간에 진제환은 마지막 한발의 총알로 장렬히 순국했다.
현재 계림시 칠성관광지에 위치한 3장군 순직 기념탑과 800장사 묘지는 국가급 항전 기념시설로 지정되였고 매일 참관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계림시퇴역군인사무국 관련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당지에서는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로병사 강연을 조직했으며 자원봉사자를 동원하여 기념시설 환경정비를 전개하는 등 방식으로 력사유적지를 애국주의교양 진지로 전환시켜 전사회가 력사를 기억하고 위대한 항전정신을 전승하는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항일투쟁의 력사를 담고 있는 이 항전기념시설은 중국 군민의 불굴의 항전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리적 표식으로 되였다.
신화사 기자 림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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