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악생은 교현(지금의 산동성 청도 교주시) 동향의 ‘삼걸(三杰)’중 한명으로서 교현사범강습소 당조직의 중요 성원이였고 교현 항일민주정부 초대 현장이였다. 그는 혁명투쟁기간에 4차례 체포되였으며 당의 사업과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에 한몸을 바쳤다.

강악생은 본명은 강효건이고 교현 동향 대점촌(지금의 교주시 교동가두)에서 태여났다. 1928년, 강악생은 교현사범강습소에 입학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여름, 강악생은 고향으로 돌아가 대구하 농민무장폭동 준비 사업에 참가했다. 폭동계획 비밀이 루설되면서 강악생은 제남으로 돌아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 당조직이 파괴되면서 체포되였다.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당조직은 강악생에게 국민당의 ‘공산당체포대’에 잠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진상을 모르는 동지들의 따가운 눈길을 참으며 모든 기회를 적극적으로 리용하여 당의 지하조직과 유생력량을 보호했다.
한번은 강악생이 ‘공산당체포대’를 따라 제남 실험극장에서 공산당 인원을 감시하다가 진보학생들의 활동현장을 목격하게 되였다. 강악생은 급히 학생들에게 빨리 떠나라고 귀띔해주어 국민당 특무의 수색과 체포를 피하게 했다. 1935년 겨울, 그는 ‘공산당체포대’와 함께 모평에 가 교동의 ‘11.4’ 폭동인원을 수색, 체포하게 되였는데 마을에 접근할 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 촌민에게 소식을 알려 당원, 간부 및 진보대중들이 제때에 이전하게 했다. 그는 여러차례 당의 간부를 엄호하다가 적의 의심을 받았는데 모평에서 재차 체포되여 제남감옥에 갇혔다.
로구교사변 후 전민 항전이 폭발하였으며 국공 련합항일의 형세하에서 강악생은 석방되여 출옥했다. 그 후 강악생은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에 뛰여들었다.
당시 산동성 보안제1려 려장 강려천과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1941년 11월초 강악생은 강려천 대표와 함께 해양항일근거지에 도착해 협력사항을 상세히 상담했다. 그 후 강악생 등이 강려천의 부하인 수영서의 주둔지에 도착했다가 수영서에게 억류되였다.
수영서는 공산당과의 협력을 극력 반대했다. 그는 강악생 등을 마을 밖의 고구마 움에 가두어넣고 그들을 이미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밤, 감시가 해이해진 틈을 타 여러 사람들은 힘을 합쳐 강악생을 움 밖으로 밀어내 탈출하게 했으나 그는 다시 고구마 움으로 되돌아와 함께 탈출할 것을 설득했다.
1943년 11월, 교현항일민주정부가 설립되고 강악생이 초대 현장으로 임명되였다. 1944년, 일본군과 괴뢰군은 우리 근거지에 대한 ‘소탕’을 감행했다. 2월 6일, 강악생은 교현당위 회의에 참가하는 도중 일본군과 괴뢰군의 습격을 받아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강악생의 현장 신분은 곧 일본군에게 알려졌고 적들이 갖은 가혹한 고문과 유인수단으로도 강악생의 혁명의지를 동요시킬 수 없었다. 잔인한 적들은 강악생을 심문실에서 살해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1942년 5월, 중국공산당 교현 초대 현위 서기 리규생이 체포되였을 때 현당위는 여러차례 구출을 시도했지만 성사하지 못했다. 1943년 11월, 극한의 상황에서 강악생은 2000원을 모아 리규생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강악생의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혁명사업에 뛰여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하당에 정보를 전달하고 간부를 호송하다가 소중한 생명을 바쳤으며 그의 안해도 당조직에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교주시퇴역군인봉사중심 부주임 마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악생의 일생은 짧지만 찬란했다. 그가 여러차례 오해를 받고도 초심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산과 같이 견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사 기자 왕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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