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풀이 뒤덮인 초원에 우뚝 서있는 내몽골 우신기혁명이야기강습관은 장엄하고 숙연하다. 강습관내에서 당원의 날 활동을 진행하고 있던 당원들은 전시판 앞에서 ‘기금산-항일전쟁과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영웅’이라는 글씨를 응시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비쳐진 항일영웅의 확고한 눈빛은 마치 80여년 전 초원의 봉화세월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기금산은 몽골족이고 1894년에 내몽골 우신기에서 태여났다. 1935년, 중공중앙은 ‘내몽골인민에 대한 중화쏘베트 중앙정부의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이 소수민족을 단결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선전했다. 이 선언은 몽골어로 번역되여 초원에 전파되였으며 기금산은 이 선언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과 혁명주장을 깊이 리해하게 되였다.
1936년 가을, 몽골족 귀족 출신의 이 초원 사나이는 현지에 파견되여 내몽골지역에서 민족사업을 진행하던 공산당원 여러명과 의형제를 맺었다. 그 후 기금산은 중국공산당을 진심으로 옹호하고 중국공산당 우신기사업위원회와 적극 협력하여 많은 사업을 전개했다.
7.7사변 후, 기금산의 고향인 이흐쥬맹(지금의 올도스시)의 형세가 위급해졌다. 내몽골 각기의 왕공중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적에게 투항했고 우신기 왕부는 사람을 포두로 보내 일본군, 괴뢰군과 암암리에 련락을 취했다. 이런 관건적인 시각에 기금산은 초원의 진보인사들과 함께 왕부의 타협, 항복 주장을 견결히 반대했다.
1939년말, 국민당 완고파는 항일전쟁 이래 처음으로 반공 고조를 일으켰고 이흐쥬맹에 주둔해있던 국민당군대는 중국공산당의 항일활동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여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적들은 이흐쥬맹에 있던 공산당과 그 령도하에 있는 인민무장력량을 필사적으로 배척하고 항일민주사상을 가진 진보인사들을 박해했다.
투쟁 과정에서 항전을 주장하는 기금산은 중국공산당 우신기사업위원회 사업에 적극 편리를 제공해주었으며 그가 생활하던 곳은 사업위원회 동지들이 은신하는 안전지대로 되였으며 적들은 이곳을 ‘쏘베트구역’으로 불렀다.
1943년 10월, 기금산은 정식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고 소속 부대를 우신기기병퇀으로 개편했으며 직접 퇀장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연안에 가 공부하고 시야를 넓혔으며 초원으로 돌아간 후 당조직에 정치지도원을 파견하도록 신청해 우신기기병퇀 간부대오를 충실히 했다.
우신기 지방사 연구자 학계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당 완고파들은 기금산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 1945년 음력설 전야에 국민당 완고파들은 5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기금산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2월 16일(음력 정월 초나흘), 기병퇀 간부와 전사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낼 때 적들은 퇀부에 남아있던 기금산을 살해했다.
비보가 초원에 퍼지고 연안에 전해졌다. 1945년 5월 8일, 중공중앙 서북국 통일전선부 몽골족사업을 책임진 우란후는 연안 《해방일보》에 기금산을 추모하는 글을 발표하여 기금산을 우신기인민들의 사랑을 깊이 받는 진보장령이라고 칭찬했다.
세월이 흐르고 포연은 끝내 흩어졌다. 기금산과 전우들이 분투했던 우신기 무정하진 바투만촌 땅에는 현재 바투만 홍색문화 소도시가 건설되여있다. 이곳에서 어릴 때부터 기금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은 렬사의 이야기를 전국 각지에서 온 참관자들에게 들려주면서 홍색정신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다.
신화사 기자 하리나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