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신현 곽가하향 토문촌에는 앞뒤로 다섯칸의 기와집으로 구성된 집터가 있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참관 방문하는데 이곳이 바로 항일장수 엽성환의 고택이다. 기와집 내부의 전시판에는 엽성환의 짧지만 빛나는 생애가 기록되여있다.
엽성환은 1914년생으로 1929년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악예환(鄂豫皖) 쏘베트구역에서 그는 선후하여 지도원, 영 정치위원, 퇀 정치위원, 사장, 사 정치위원 등 직을 맡았고 부대를 이끌고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홍군 제4방면군의 용맹한 장수중의 한명이였다.

전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그는 팔로군 제129사 386려 772퇀 퇀장을 맡았다. 1938년 2월부터 3월까지 그는 부대를 이끌고 장생구, 신두령, 향당포 등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강력히 타격하고 견제했으며 진동남 항일근거지를 창설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38년 4월 16일 아침, 산서성 무향의 장락촌에서 전투가 시작되였고 엽성환은 제772퇀을 이끌고 형제부대와 함께 동쪽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여러 구간으로 가로막으며 좁은 계곡으로 몰았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였고 팔로군은 총 2200여명의 적을 섬멸했다.
이때 1000여명의 적들이 료현에서 지원해왔다. 이 많은 적들을 모두 섬멸할 수 없었기에 상급은 일부 병력으로 적을 현혹하고 견제하기로 했으며 주력부대가 즉시 전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엽성환은 명령을 받은 후 한편으로는 부대를 지휘하여 전장을 정리하고 전리품을 운반하며 철수를 준비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언덕에 올라 적의 증원부대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안전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총알이 그의 머리를 명중했다. 18일 새벽, 엽성환은 향년 24세 나이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엽성환의 유체는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晋冀鲁豫)렬사릉원에 이장되였다.
엽성환의 고향인 악예환 쏘베트구역 수부도시 렬사릉원에는 그의 유품이 매장된 묘지가 있어 고향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렬사릉원에 자리한 렬사기념관에서 그의 영웅사적은 수많은 참관객들을 고무하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신현에 홍색교양을 받으러 온 하남 신양시 시민인 호결은 “엽성환이 너무도 젊은 나이에 희생되였다. 우리 지금의 행복한 삶은 렬사들이 선혈로 바꾸어온 것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엽성환의 일부 후손들은 여전히 토문촌에 살면서 고택을 지키고 엽성환의 영웅사적을 전하고 있다.
이미 군인이 된 엽성환의 조카 증손인 엽문문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께서는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정신을 따라배우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장서서 조국땅을 잘 지켜나갈 것이다.”
신화사 기자 류금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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