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자치구 훌룬부이르시 아룬기에 위치한 항일련군영웅원에는 소나무가 우거져있고 우뚝 서있는 동상들은 기세가 호매롭다. 이 동상들은 동북항일련군 명장인 풍치강이 군대를 거느리고 돌격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940년, 훌룬부이르 아룬기에서 풍치강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32세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풍치강은 1908년 길림성에서 태여났으며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성장했다. 1931년 9.18사변 후 풍치강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당지의 한 금광에서 일했다. 이듬해에 풍치강은 형 풍치국과 함께 광산호위대에 가입했으며 금광에 있던 총기를 리용하여 투쟁을 했다. 이때 광산호위대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탕원유격대와 련락이 있었다.
1934년, 한차례 참혹한 전투를 거쳐 광산호위대 대부분 대원과 형 풍치국이 희생되자 풍치강은 남은 력량으로 문무대를 설립하고 일본군, 괴뢰군과 투쟁을 전개했다. 이 대오는 홍군 규률을 규칙제도로 제정했고 1년 동안 60여명의 전투력량을 발전시켰다.
1935년 가을, 문무대는 탕원유격총대에 가입했고 풍치강이 중대장을 맡았다. 소흥안령지역에서 풍치강 등은 괴뢰군의 거점을 공격하고 적군의 총기를 로획하면서 적후 무장세력을 끊임없이 장대시켰다. 이듬해 1월, 탕원유격총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개편되였고 풍치강이 제3퇀 퇀장을 맡았다. 군장 하운걸의 인솔하에 이 부대는 선후하여 학강탄광 기습, 일본군 기차 습격 등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풍치강도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1936년 6월, 풍치강은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 참모장으로 승진했다. 적군의 다병종 밀집 포위하에 풍치강은 부대를 이끌고 기아와 추위를 참으며 겹겹한 포위를 뚫고 적의 배후에 한자루의 비수처럼 깊숙이 들어갔다. 1937년, 풍치강은 부대를 지휘하여 탕원 현성을 야간 습격해 수십명의 우리측 인사들을 구출했으며 적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39년 9월 18일, 9.18사변 8돐에 즈음하여 풍치강은 부대를 인솔하여 나하현을 공격하고 괴뢰군 퇀장을 생포했으며 대량의 물자를 로획해 군민의 투지를 크게 진작시켰다. 풍치강 부대는 그 후 반년 동안 70여차례 전투를 벌리면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40년 1월 14일, 풍치강은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룡강북부지휘부의 지휘을 맡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흥망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기에 드높은 혁명열정으로 조국에 충성하고 일본놈들과의 결전을 벌려야 한다.” 반달 후, 풍치강은 아룬기 삼차하 일대에서 산에 올라 적군의 동향을 살피다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3일 후인 음력 그믐날 밤, 아룬기의 마을들은 온통 적막으로 차있었고 밀림의 나무는 영웅을 추모하듯 조용히 흔들렸다.
오늘날, 매년 음력 12월 27일이 되면 풍치강이 희생된 곳에 세워진 비석과 항일련군영웅원의 동상 앞에는 언제나 생화가 가득 놓여있다.
신화사 기자 하서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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