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성 태주시 로교구에는 장군의 이름으로 명명된 소학교인 안보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항일명장 진안보의 모교이다. 항전시기 학교 건물이 파괴되여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보 장군은 평생 모은 돈을 기부금으로 내 학교를 재건했다.
현재 안보학교는 개조가 완료되여 교육시설과 기능이 완벽한 현대화 초등학교로 건설되였다. 안보학교 학생 진흠우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학교에서는 진안보 장군 사적을 사상정치교육 내용으로 정기적으로 들려줄 뿐만 아니라 렬사에 대한 추억을 판화제작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장군의 정충보국 정신을 대대로 전승하고 있다.

진안보는 자가 선부이고 1891년에 절강 황암 횡가향 마원촌(현재 태주시 로교구 횡가진에 속함)에서 태여났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폭발하면서 당시 수천수만명의 열혈청년들과 마찬가지로 20살이였던 진안보는 붓을 던지고 종군하기로 결정했다. 보정륙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진안보는 북벌전쟁에 참가했는데 전공이 탁월하여 대대장에서 선후하여 제33퇀 퇀장, 제17려 려장, 제79사 부사장, 사장을 력임했다.
전국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진안보는 부대를 인솔하여 송호회전에 참가했다. 평호항전에서 진안보부대는 황고툰사건의 원흉중 한명인 ‘만주 개척단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도우구 데쯔오를 사살해 일본침략자들의 기염을 크게 꺾어놓았다.
진안보는 이후 국민혁명군 륙군 제29군 군장 겸 제79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29군은 송철원, 장자충, 조등우, 동린각 등 많은 항일명장을 배출했으며 29군의 ‘대도대’는 항전력사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39년 3월, 진안보는 부대를 인솔하여 남창전역에 참가했다. 5월 6일 새벽녘에 일본군이 진안보부대를 공격하면서 아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6일 17시, 일본군이 중국군의 진지를 돌파하면서 쌍방은 백병전을 벌렸다. 진안보 장군은 몇명의 경비원을 데리고 적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으로 달려가 독전하다가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받아 복부에 총상을 입고 장렬히 순국했다.
진안보 장군의 순국은 수많은 국민들의 항전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장군의 시신이 고향으로 돌아와 절강 태주 봉황산에 안장되였을 때 연도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현재 진안보의 영웅사적은 이미 향토교재로 편찬되여 태주시 로교구 중소학교 수업내용으로 들어갔다. 진안보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태주 현지에는 안보광장, 안보학교, 진안보렬사릉원과 진안보기념관을 건설했다.
진안보기념관에 들어서면 장군이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전장을 질주하는 동제 조각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내의 사료는 진안보 장군의 보국인생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은 유명한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여 많은 참관자들을 맞이한다. 신화사 기자 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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