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기슭에 위치한 태안혁명렬사릉원의 북쪽에는 10기의 대형 화강암 무덤이 일렬로 늘어서있으며 항일영웅 리정화가 이곳에 잠들어있다.

리정화는 본명이 리련수, 1905년에 태안현 조하아촌(현재 태안시 대악구 마장진 조하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감이 넘쳤으며 반동세력과 용감하게 싸웠다.
20세기 20~30년대의 중국은 인민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슬픔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던 리정화는 자체로 자금을 모아 마을에 민중소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무료로 학교에 다니게 했다. 또한 보제중약점을 열어 마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 사이에 그는 열혈 청년들을 단합시켜 대중들 마음에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1937년, 리정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7.7사변 이후 일본군은 남쪽으로 대거 공격하여 제남과 태안이 잇달아 함락되였다. 국난이 닥치자 리정화는 고심하여 운영하던 민중소학교와 중약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장포를 벗어던지고 무기를 들었다. 그는 항일무장을 조직하여 전심전력으로 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었다.
1938년 양력설의 이른아침, 리정화와 장걸은 50여명의 유격대원을 이끌고 조하아 대교의 다리목에 집결하여 동향봉기에 참가했다. 10여일 후, 대오는 하장향수사에 도착하여 산동 서구 인민항적자위단에 합류하였고 그때부터 당의 령도하에 무장항일 로정에 올랐다.
자위단에 가입한 후 리정화는 뛰여난 지휘와 전투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비성전역, 계수습격, 무량전 매복전 등 수십차례의 전투를 지휘하고 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태서군민의 항전 투지를 크게 고무시켰다. 자위단이 명성을 떨치자 주변의 여러 봉기대오들도 분분히 자위단에 가입했다.
1941년 4월 22일, 리정화는 태서군분구 사령부에서 회의를 열고 돌아오는 길에 비성 송가장의 촌민집에서 숙박하다가 적들에게 포위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땅굴로 들어가 숨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통신원을 거느리고 마을 밖으로 돌격하여 포위를 돌파하다가 마을어구에서 총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이 항일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태안현당위와 현 항일민주정부는 렬사의 고향에서 성대한 추도회를 거행했다. 1963년, 리정화 렬사의 유해는 조하아촌에서 태안혁명렬사릉원에 이장되였다. 2020년 9월, 리정화는 제3진 유명한 항일영렬, 영웅 단체 명부에 입선되였다.
리정화가 희생된 후 그의 큰아들인 리서운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항일전쟁에 참가했다가 1945년 10월에 영용하게 희생되였는데 나이는 겨우 20살이였다. 1951년, 촌농민협회는 리정화의 후손에게 ‘일문쌍렬’이라는 간판을 증정했다.
2021년, 산동서구 인민항적자위단 5대대 기념관이 조하촌에서 개관되였다. 지금은 이미 대악구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였으며 매년 혁명교양을 받으러 오는 수많은 당원, 간부와 군중들을 접대하고 있다. 조하촌 당지부 서기이자 기념관 책임자인 마효화는 “리정화가 간고한 환경 속에서 초심을 굳게 지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적은 홍색유전자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정신은 시공을 초월해 당대 사람들이 력사를 명기하고 사명을 계승하도록 격려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조하촌 입구, 당시 리정화가 유격대를 이끌고 집결했던 곳에는 ‘조하유격대 출발지점’이라는 비석과 정자가 세워졌다. 정자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있다. 민족이 멸망위기에 처했을 때 지사가 용감히 나섰고 초연이 가신 지금도 영웅의 사적은 우리를 격려한다.
신화사 기자 등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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