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부평현 렬사릉원, 떠오르는 아침해가 고요히 잠든 비석들을 내리비추고 있다. 광장에는 렬사 석가식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데 그의 표정은 차분하고 눈빛은 깊이 있어 마치 사람을 그 력동적인 혁명시대로 순간적으로 데려가주는 듯했다.
석가식은 1918년에 섬서성 부평현 설진 반석촌에서 태여났으며 16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서안성립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9.18사변 후, 일본 제국주의가 산해관으로 진격하면서 화북이 위태로워졌다.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석가식은 1936년에 《마음의 소리》 잡지를 창간했고 항일구국 운동을 여러번 조직했으며 이로써 반동 당국 여러 면의 감시를 받게 되였다.
1937년, 석가식은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가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했으며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졸업 후, 그는 팔로군 129사를 따라 황하를 건너 산서 항일 전선으로 향했으며 선후하여 장생구, 신두령, 향당포 등 전투에 참가했다.

1938년 2월, 진동남에서 적군의 포위공격에 반격할 때 석가식은 자발적으로 한개 반을 이끌고 적들의 진영에 진입해 정찰임무를 수행했으며 10여명의 일본군을 소멸시켜 군구로부터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 후, 석가식은 129사와 함께 하북으로 이동하여 덕석 적공대 대장을 맡았다. 적군의 봉쇄를 돌파하고 기남과 기중의 통로를 뚫기 위해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덕석 철도로선에서 령활하게 활동하며 놈들을 물리치고 매국노를 제거하며 정보를 탈취하고 무기를 불태웠으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차례 조직했다.
1940년, 적군의 정보를 더 얻기 위해 석가식은 덕주에 ‘만주국 대북보 백천판매사’를 설립하고 외무주임 겸 《대북보》 덕주 특파원을 맡았으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괴뢰 기관에서 하달하는 위임장과 신분증을 받았다. 그는 신분의 위장하에 덕주에 주재하는 일본 괴뢰군의 크고 작은 기관을 드나들며 많은 귀중한 정보를 얻었고 이 기회를 틈타 일본군 반장 한명과 국민당 간첩 한명을 처형했다.
1943년 3월, 덕주 지하정보조직이 파괴되고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 석가식은 불행히도 체포되였다. 기남군구가 사람을 보내 구출하려고 할 때 그는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저 한 사람을 위해 그 많은 동지들이 희생된다면 당과 인민에게 큰 손실을 가져다줄 것이다. 부대는 절대로 구출작전을 해서는 안된다. 공산당원인 내가 감옥에서 적들과 계속 싸울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죽어도 원이 없다.”
1943년 5월, 석가식은 여러가지 고문을 당한 후 하북성 경현 룡화진에서 적들에게 살해되였는데 그해 나이가 25세였다.
석가식은 전투를 위해 섬서, 산서, 하북, 산동 등 여러 지역을 넘나들었으며 영웅의 이름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올해 7월, 산동성 덕주시 덕성구당위 당사연구중심의 사업일군은 특별히 섬서성 부평현으로 가 방문과 좌담회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석가식의 완전한 사적을 정리하고 복원했다.
중공부평현위 당사연구중심 주임 섭방방은 “석가식의 몸에서 우리는 공산당원의 확고한 혁명 신앙과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전투 지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기개를 보았다. 우리는 석가식의 사적을 《부평 홍색이야기》라는 책에 써넣었으며 또 짧은 영상을 만들어 학교, 기업, 사회구역, 마을 등에서 선전 강연함으로써 영웅의 정신과 사적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지도록 했다.”고 말했다.
수많은 혁명 선배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되찾았다. 석가식의 사적을 회고하며 그의 조카인 석해량은 “큰아버지의 일생은 짧지만 전설적이다. 그의 지혜와 열정, 리상과 신념은 언제나 우리 후배들이 열심히 분투하도록 격려하는 정신적 동력이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리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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