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숭실은 1915년에 계현 문장자(오늘의 천진시 계주구 관장진 문장자촌)의 지식인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왕수동은 마을에서 의무적으로 글을 가르쳤으며 5.4운동의 새로운 사상 영향을 많이 받고 교육구국을 주장하는 애국인사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년 왕숭실은 점차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사상이 진보적인 혁명청년으로 성장했다.

왕숭실의 조카 왕신증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왕숭실은 특히 문학을 좋아하고 혁명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10여살 때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는 또 소설과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쓴 《밀밭의 풍파》는 산문 형식으로 밀이삭을 줏던 가난한 아이와 지주아들이 투쟁하는 이야기를 묘사했는데 바로 그가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밀이삭을 주으며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1931년 9.18사변 후, 북평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왕숭실은 학우들과 함께 반제대동맹에 참가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제명되였다. 고향에 돌아온 왕숭실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방 반동정권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당산 조각장탄광의 중학교를 전전하면서 혁명사업을 전개했고 18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후 왕숭실은 재차 학교에서 제명되였고 당조직은 그를 림서, 고야 일대에 파견하여 로동자운동사업에 종사하게 했다. 수입원천이 없어서 막로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여러차례 로동자들을 조직해 일본침략자에 대항하는 파업활동을 벌이면서 활동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1936년, 왕숭실은 고향으로 돌아와 선후하여 별산진과 주화산촌에서 글을 가르치며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한 동시에 자체로 교재를 편집하여 소년아동들에게 계몽교육을 진행했다.
전민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계현당위는 대규모의 군중성 항일구국운동을 조직하기로 했다. 왕숭실은 계현을 메주 밟듯 돌아다니며 사업을 전개했고 여러 지역에 당조직을 건립했다. 그는 활동능력이 강하고 사업이 적극적이고 주동적이였으며 점차 하북 동서부의 당원골간으로 성장했다. 1938년 4월, 왕숭실은 계현당위가 반산 천상사에서 소집한 무장폭동 준비회의에 참가했으며 당시 23세였던 왕숭실은 중국공산당 하북성당위로부터 계현당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항일무장폭동이 시작된 후 왕숭실은 여러 골간들과 함께 항일련군 제5총대를 조직하고 정치주임을 맡았다. 7월말, 왕숭실은 폭동대오를 인솔하여 팔로군 제4종대와 기타 항련대오와 협력하여 계현 현성을 공략했다. 전투중에 그는 늘 돌격에 앞장섰으며 새 당원들에게 공산당원은 혁명을 위해 고생을 먼저 하고 향수를 후에 해야 하며 항일을 하려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1938년 8월 16일, 왕숭실은 폭동대오를 인솔하고 기동항일련군 홍린각 부대와 협력하여 옥전 현성을 공략했으며 부대를 거느리고 계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별산진에서 일본군과 조우하면서 치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포위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왕숭실은 앞장서서 용감하게 돌진하며 적의 화력을 막아냈으며 포위된 부대는 성공적으로 포위를 돌파했지만 왕숭실은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2015년 8월, 왕숭실은 민정부가 발표한 제2차 600명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부에 선정되였다.
현재 왕숭실 렬사의 묘비는 천진 반산렬사릉원의 소나무 사이에 우뚝 솟아있으며 빛바랜 사진과 혁명유물들이 조용히 전시청에 놓여있다. 매번 청명절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온 청소년들이 이곳에 와 선렬을 기린다.
신화사 기자 윤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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