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외 7수)□ 강효삼

2023-02-10 09:30:31

구름에 거주지를 정할 수 없어

바람에 날려온

눈들은 난민이다

마구잡이로 하얗게 떼지어 몰려와서

정 발 디딜 곳 없으면

아칠한 나무가지 그 등 우에도 앉아견디는

국적이 따로 없는 난민

하지만 영원이 아니고 오로지 겨울 한철 뿐인

계절의 난민.



눈 2


그 무슨 사연이 적힌 종이쪼각이기에

저렇게 마구 찢어버리는가

눈은 한번 버리면 다시 거두지 않을

낡은 사연의 편지들

더는 숨기고 싶지 않는 생활의 고뇌

무거운 짐이 되여 짓누르지 않게

켜켜이 쌓인 사연 그냥

미련 없이 훌- 훌- 찢어버리네


그리하여 속시원히 털어버리는 저 구름의 쪼각들

자유로운 꽃잎이 되여 흩날리네

눈 오는 날이 그리도  상쾌한 건

아마도 구름이 가슴에 맺힌 고뇌를

다 털어버리기 때문인가.



눈 3


사각사각 창 밖에서 눈 내리는 소리는

마치 종이 우에서 펜 끝이 달리는 소리 같다

무슨 대단한 문장을 쓰기에

밤이 새도록 저리 열심인가

이튿날 아침 뜰에 나서니

고스란히 펼쳐놓았구나,

알겠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깨끗한 백지

그것은 눈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란 걸

자신이 글을 독차지할 대신

저 너른 공백에 누구든 마음껏

새로운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눈의 문장.



눈 4


오랜 인습과 진부한 경험에 휩싸여

련속적으로 이어지는 과거의 테두리에서

속시원히 해탈하기란 얼마나 힘겨운가

그 어떤 새로움의 충격이 없이는 쉽지 않은데

그런 풍경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흰 눈이 내려 내려 세상이 온통

한장의 공백이 되는 날은

내가 나를 떳떳이 선보일 수 있는 날

나는 나의 발자국으로 백지 우에

한줄기 길을 틔워놓겠다

어제날 걸은 길을 지워버리고.



눈 5


방안은 조용한데 어두운 바깥에선

싸락싸락 비질하는 소리,

가을 나무들이 떨군 락엽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 비질을 멈추지 않는 것인가

밤이 지새도록 얼마나 멀리 쓸어갔는지?

이른 아침 궁금해 문 열고 나가 보니

내 딛고 선 발끝에서

저기 저 아득히 먼 지평선까지

깨끗이 쓸어갔구나 ㅡ


아무것도 없다.



눈 6


자고 나니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였다

하루밤 새 백발이 되였구나

눈부시다 깨끗하다

사람의 백발은 소년 청년 중년 로년을 거쳐

그것도 죽을 때 되여야 백발인데

자연은 저리 빨리 늙네

하면 다 같은 백발이지만

저 백발은 어떤 백발인가

머리에 물감을 드린 듯 서두른 백발이기에

봄이 오면 녹아버릴 가벼운 백발이다

인간의 백발은 오랜 시간 물들여온 것이여서

봄이 와도 녹지 않는데.



눈 7


한줌 꽉 부르쥐고 힘주어 짜면

찔끔 손가락 사이로 진물이 나올 듯

삽시에 세상을  얼굼 속에 밀어넣으려는

깜짝 첫시작으로 오는 것이지만

첫눈 내린 후에 뒤따라오는 것은

손 시린 랭혹이 아니라 별로

차분히 젖어드는 포근함

첫눈은 알고 오는가

비가 될 것이 눈으로 분장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리자마자 살며시 녹아버리지.


눈8


눈이다 눈, 눈, 눈이 왔다

눈은 곧바로 발 디딘 곳에

자기만의 포근한 보금자리 꿈꾼다만

심술궂은 바람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채찍으로 후려치며 양떼처럼 몰아가네

그렇게 밀려 가다가다 어느

골짜기에 거꾸로 쳐박혀

세상을 등지고 살지만

우묵한 골짜기에서도

평생을 닦아온 그 하얗고 깨끗한 이미지만은

결코 저버리지 않는 눈


눈이다 눈, 눈, 눈이 온다

너무 약하고 순수해서

누구나 제멋대로 짓밟아 뭉개지만

짓밟힐수록 오히려

돌같이 단단한 뼈로 거듭난다

그 이상은 더 낮아질 수 없는 곳에 엎드려

압제에 짓눌리면 짓눌릴수록

더 강한 뼈를 갖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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