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에서 잡아탄 택시의 문을 닫자마자 낯선 이의 목소리가 내 사적인 령역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왔소?”
남방의 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내게 이 질문은 단순한 인사 이상으로 들렸다. 남방에서 택시 기사와 승객 사이의 침묵은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였다. 목적지를 말하거나 휴대전화 번호의 마지막 네 자리를 확인하고 나면 창밖을 바라보거나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만이였다. 탑승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례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길의 택시에서는 한마디를 받아주는 순간 대화가 예상보다 훨씬 먼곳까지 나아가군 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나는 본의 아니게 기사의 한달 수입은 물론이고 자녀의 근황과 안해를 처음 만난 이야기, 심지어 본가와 처가의 친척 관계까지 깡그리 알게 될 때도 있었다. 택시비에는 이동료금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축약된 자서전까지 포함되여있는 듯했다.
지난해 할빈에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최근 북방의 몇몇 도시가 왕훙도시로 떠오르고 있으니 수입도 제법 좋아지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택시 기사는 긴 한숨부터 내쉬였다. 그러고는 할빈의 력사와 한 도시의 흥망성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운명까지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시사에 밝기로 유명한 북경의 택시 기사도 탄복할 만한 식견과 말솜씨였다. 목적지로 가는 동안 택시는 잠시 움직이는 시사토론장이 되였다.
물론 이런 몇번의 경험만으로 남방과 북방의 문화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북방 사람도 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남방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두 지역이 보여주는 태도의 차이는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경계가 필요하며 그 경계는 대체 누가 정하는가 하는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남방도시의 인간관계는 단단한 선으로 구획된 공간과 닮았다. 지하철이나 엘레베터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이어폰에 몸을 맡긴다. 상대가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그의 사정에 좀처럼 개입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무관심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당신의 령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도시적 례의가 배여있다. 아무리 궁금해도 타인의 사생활을 캐묻지 않고 혼자 있고 싶은 사람에게 침묵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랭담함의 표시라기보다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는 안전장치에 가깝다.
반면 내가 북방에서 경험한 택시 기사들과의 대화는 경계보다 련결을 먼저 확인하는 방식이였다. 기사가 승객의 고향과 가족, 직업을 묻는 것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낯선 사람을 잠시나마 자신의 관계망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당신은 누구와 련결되여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 가까웠다. 북방의 친근함은 한 개인을 고립된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그의 가족과 고향, 살아온 리력을 통해 리해하려 들었다.
그래서 이곳의 대화는 일종의 상호 개방처럼 느껴진다. 기사가 먼저 자신의 수입과 가족사를 털어놓으면 승객도 고향과 직업 정도는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 안에는 낯선 이를 향한 호의가 있지만 동시에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도 같이 따라온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람 사는 정으로 느껴지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생활을 침범당하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질문하는 사람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과 질문받는 사람이 불편하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동시에 성립한다.
인터넷에서 이와 관련된 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다. 남방을 려행하던 한 북방 사람이 지하철에서 옆자리 승객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이렇게 더울가요?”
그러자 상대는 전염병이라도 피하듯 자리를 옮겼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그는 이번에는 반대편에 앉은 사람에게 “이곳은 여름이 몇달이나 되나요?”라고 물었다. 상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왜 저한테 말을 거시죠?”
북방 사람에게는 날씨를 소재로 한 가벼운 인사였지만 남방 사람에게는 낯선 이가 별다른 리유 없이 자신의 령역으로 들어오는 행동이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한쪽에는 경계가 있고 다른 쪽에는 경계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생긴다. 남방 사람은 북방의 질문을 사생활 침해로 받아들이고 북방 사람은 남방의 침묵을 랭담한 거절로 오해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배려이고 다른 쪽에서는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이 배려이다. 같은 호의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옳은가. 아마 정답은 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거리를 조절하는 감각이다. 짧게 대답하는 사람에게 계속 사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대화를 원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침묵으로만 응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질문할 자유 만큼 대답하지 않을 자유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사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례의일 것이다. 좋은 경계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신호에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방의 택시에서 나는 가끔 피곤했고 때로는 당황했으며 어떤 날에는 뜻밖의 즐거움도 느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도시의 모습이 기사들의 말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요즘 장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녀가 타지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듣다 보면 나는 잠시 관광객이나 승객이 아니라 그 도시의 일상에 참여한 사람이 된다. 낯선 사람의 지나치게 상세한 가족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그 말들 덕분에 낯선 도시 역시 똑같이 사람들이 먹고 살고, 서로 사랑하고, 자식을 걱정하는 동네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곳은 조금 덜 낯설어진다.
어쩌면 남방은 내게 서로의 경계를 지키는 례의를 가르쳐주었고 북방은 때로 그 경계 너머로 말을 건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어느 한쪽의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계가 전혀 없다면 친근함은 침범이 되고 경계가 지나치게 단단하다면 존중은 고립이 된다. 필요한 것은 랭정과 열정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상대가 허락한 만큼 다가가고 상대가 불편해하는 순간 멈출 줄 아는 지혜를 갖추는 일이다.
연길의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조금 전까지 서로의 가족사를 나누던 기사와 나는 다시 이름 모를 타인이 된다. 그러나 완전히 처음과 같은 타인은 아니다. 나는 그의 삶을 조금 알게 되였고 그는 내 삶의 한쪼각을 들었다. 우리의 경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대화가 오간 자리 만큼은 조금 느슨해졌다. 처음 택시에 올랐을 때 바짝 굳어있던 어깨에도 어느새 힘이 풀려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도 아마 그와 같을 것이다. 랭정과 열정 사이를 유지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차거우면 서로에게 닿을 수 없고 너무 뜨거우면 상대의 령역을 태워버린다. 좋은 관계란 선을 무작정 긋거나 지우는 데 있지 않다. 그 선을 사이에 두고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조용히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남방의 ‘랭정’과 북방의 ‘열정’ 사이에서 내가 새롭게 배운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법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온도를 한결 신중하게 헤아리는 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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