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휴일, 안해와 함께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갔다가 길가에 핀 질경이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만난 질경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여러가지 상념에 잠겼다.
질경이는 비옥한 땅보다 일부러 척박한 땅을 골라 뿌리를 내린다. 키도 작고 모양새도 보잘것없지만 바로 그 지점이 질경이가 살아남는 전략이다. 질경이가 척박한 땅을 선택하는 리유는 분명하다. 비옥한 땅에서 키 큰 식물들과 경쟁해봐야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길바닥에 싹을 틔워 사람에게 밟히고 수레에 치이면서 자라기를 자처한다. 비록 고난은 따르지만 그곳에는 질경이만의 령역과 자유가 있다.
척박한 환경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질경이의 생존방식은 눈물겹도록 경이롭다. 숱한 발길질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잎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질감이 질기면서도 유연하다. 밟히면 갈라질지언정 좀처럼 꺾이지는 않는다. 심지어 질경이는 밟히는 고난을 번식의 기회로 역리용한다. 사람의 신발 밑창이나 짐승의 발, 자동차 바퀴에 제 씨앗을 묻혀 멀리 퍼뜨리는 것이다. 한계를 기회로 바꿔 삶을 이어가는 지혜의 풀, 그것이 바로 질경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진정한 기회는 자세를 낮추는 사람에게만 보이며 환경이 척박하고 생이 절박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흔히 좋은 기회란 높은 곳에 있거나 경제 호황기에 찾아온다고 믿지만 대개의 기회는 땅바닥에 깔려있거나 오히려 경제 쇠퇴기에 발생하는 법이다.
나는 ‘절박감’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절박감은 인생을 가장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을 회피할 수는 있어도 현실을 회피한 결과로부터는 결코 도망칠 수 없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주막집 마당에 누워 날마다 끙끙거리는 게으른 개가 있었다. 주막을 찾을 때마다 개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선비가 주모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주모, 저 개는 어디가 아픈 모양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주모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저놈이 못 박힌 나무 우에 누워있어서 그래요.” 당황한 선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서 쉬면 될 것 아니오?” 주모가 대꾸했다. “아직 덜 아픈 게지요!” 직설적이면서도 무심하게 내뱉은 주모의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사람은 누구나 배가 부르면 현실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졸업식 축사에서 “항상 갈망하라.(Stay Hungry)”고 말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권투를 흔히 ‘헝그리 스포츠’라 부르는 리유도 배가 고파야 절실한 주먹이 나오기 때문이다. 권투선수를 편안한 환경에서 배불리 먹인 뒤 링에 올리면 여지없이 KO패를 당하고 만다. 세계지도를 보아도 력설적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가난한 경우가 많다. 풍요로움에 취해 산업화의 목마름을 잊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여나 부족함 없이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거나 기뻐할 일은 아니다.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일수록 생활력과 의지가 약해지기 쉽다. 모진 비바람을 겪지 않은 이들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주저앉아버린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더 깊이 박듯 사람도 적절한 목마름을 유지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도태되고 만다.
삶에는 진정한 의미의 아쉬움과 부족함이 필요하다. 아쉬움이 있어야 령혼이 깨여나 숨을 쉬고 부족함이 있어야 지혜가 눈을 뜨며 진실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핍은 곧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지금 삶이 춥고 배고프다면, 인생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면 그것은 절박함과 간절함이 싹트고 있다는 신호이다. 바로 그때 희망과 기회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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