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소나무로 둘러싸인 진한장렬사릉원은 장엄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다분하다. 돈화시 한장향 한장촌 서쪽에 위치한 이곳 렬사릉원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진한장 장군은 1913년 6월 14일 돈화현 서반절하툰의 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32년, 19세의 진한장은 붓을 버리고 참군해 침략자들과 끝까지 싸우는 철혈 생애를 시작했다. 1936년에는 동북항일련군에 가입해 사단 참모장, 사단장 대리, 사단장을 력임했으며 1938년 동북항일련군 1로군 3방면군 지휘 등 직무를 맡았다. 그는 양정우, 주보중 장군의 친밀한 전우이다. 그는 항일련군 전사들을 인솔해 돈화, 녕안과 경박호 등 지역에서 8년간 일본침략군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고 한총령매복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액목현성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수백차례 지휘해 도합 만여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았으며 동북항일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사람들에게 ‘경박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940년 12월 8일, 반역자의 배신으로 진한장 장군과 10여명의 항일련군 전사가 경박호 소만구일대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였다. 전사들이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을 엄호하기 위해 진한장은 중상을 입었고 피못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희생되였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흉악한 적은 그의 머리를 베여 포르말린에 담궈 위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보내 상을 청했다. 1948년 10월 장춘 해방 후 진한장 장군의 머리를 찾아서 할빈시동북렬사기념관에 진렬했고 1955년 할빈렬사릉원에 모셨다.
진한장 장군은 돈화에서 태여난 민족영웅이다. 진한장 장군을 깊이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돈화시는 진한장 장군의 출생지를 한장향으로 명명하고 현지중학교를 한장중학교로 명명했으며 시내에 진한장공원과 여러 기념비 등을 건설했다.
2011년 7월, 돈화시는 진한장장군릉원을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장군의 머리를 고향으로 보내줄 것을 청했으며 돈화시 각계 당원, 간부와 대중들이 앞다투어 기부해 몇달 동안 루계로 100여만원을 모금했다. 진한장렬사릉원은 2012년 8월 3일에 건설되였고 2013년 5월 30일에 준공되였으며 릉원의 부지면적은 1만 7654평방메터로 비림(碑林)광장구역, 렬사기념탑구역, 렬사묘구역, 록화구역 네 부분으로 나뉜다. 2013년 4월 11일, 항일련군명장 진한장 장군의 머리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몸체와 함께 진한장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력사를 명기하고 선렬을 추모하고 애국주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해마다 청명절을 포함한 중요한 명절기간이면 돈화시 당정기관, 기업 및 사업단위의 광범한 당원, 간부와 여러 민족 각계 대중들이 진한장렬사릉원을 찾아 렬사의 넋을 기리고 있다. 진한장 장군의 굳건한 혁명신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정신, 늠름한 민족절개는 대대로 전승될 것이며 후세 사람들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분발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형옥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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