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에서 전사로…필을 무기로 삼아 항전한 욱달부

2025-06-25 08:50:26

아름다운 부춘강변에 욱달부의 옛집이 고요히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풍경을 바라보았던 그 문인은 이미 민족해방 사업에 헌신했다. 한 서생이 필을 무기로 삼아 남양에서 피를 흘리며 중국문인의 굳건한 기개를 생명으로 써냈다.

올해는 욱달부 렬사가 희생된 지 80돐이 되는 해이다. ‘반파쑈문화전사’로 불리는 이 작가는 1945년 일본이 항복선언을 한 후에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밀림에서 일본 헌병대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였다. 그의 이름은 중국문학사에 새겨져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민반파쑈전쟁기념비에도 새겨져있다.

1896년 12월 7일, 욱달부는 절강 부양 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1913년, 17살 나는 욱달부는 일본류학기간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썼다. “나는 큰 사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조국은 나의 목숨이니, 나라가 망하면 나의 생명도 끝나는 것이다.” 이 맹세는 그의 일생을 지켜온 정신적 기둥이 되였다.

신문학단체 ‘창조사’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욱달부의 문학창작은 진솔하고 통쾌하며 열정적이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며 《타락》, 《봄바람에 취한 밤》 등 작품을 통해 중국현대문학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되였다.

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문인은 결연히 서재를 떠났다. 자신의 항일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우리 세대는 항일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글을 힘있게 썼다.

이 결연한 의지 뒤에는 가슴 아픈 가족과 조국의 비극이 있었다. 1937년말, 욱달부의 고향 부양이 함락되자 70여세의 어머니는 일본군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산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욱달부는 슬픔에 잠겨 “의지할 어머니를 잃었으니 이 원쑤는 반드시 갚으리라.”라는 애도의 시구를 남겼다.

1938년 3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가 설립되였고 욱달부가 리사로 선거되였다. 그는 절강 동부와 안휘성 남부의 항일전선을 오가며 전쟁기자로 중국 군민들의 불굴의 항일전쟁을 기록했다. 같은 해말, 그는 멀리 싱가포르에 가 《성주일보》의 부록 《새벽별》의 편집을 맡았다. 이후 그는 싱가포르 문화계 항일련합회 주석직을 맡기도 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욱달부는 싱가포르에서 항일을 지지하고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글을 대량으로 발표하여 해외 화교들의 항일전쟁 사기를 크게 북돋우어주었다.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되자 욱달부는 ‘조렴’이라는 가명을 쓰고 수마트라로 망명했다. 그는 술공장을 운영하며 위장한 채 비밀리에 계속 항일사업에 종사했다.

한차례의 우연한 사고로 욱달부의 일본어능력이 드러나면서 일본 점령군에 의해 강제로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였다. 통역을 하는 동안 그는 비밀리에 적지 않은 현지인과 화교들을 도와 구출했으며 일본 헌병부의 많은 비밀과 죄행을 알게 되였다. 이 정보들은 전후 일본군의 죄행을 심판하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욱달부는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8월 29일 저녁, 그는 집에서 끌려간 후 비밀리에 살해되였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49세였다.

1952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는 욱달부를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2014년 욱달부는 전국 첫진 300명의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부에 올랐다. 오늘날 부춘강변에서 욱달부의 이름으로 명명된 학교, 부두, 공원 등은 애국문인의 정신적 불씨를 묵묵히 이어나가고 있다. 2015년 부양시가 구로 개편될 당시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기존의 시심로와 시심북로를 ‘달부로’로 개명하여 고향의 아들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표했다.

절강성작가협회 《강남》 잡지사와 항주시 부양구정부가 공동으로 설립한 욱달부소설상은 2년에 한번씩 개최되며 현재까지 8회 개최되여 점차 국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욱달부 렬사의 후손들은 선조의 정신적 유산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욱달부 렬사의 손자 욱준봉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욱달부는 그 시대를 초월한 문인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위대한 선조를 모시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의 대의와 대절은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후대들의 정신세계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정신이 봄 강물의 밀물처럼 영원히 이어지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허순달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Copyright © 200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