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생명으로 중국인민을 보위한 쿠리센코

2025-07-15 08:36:37

중경 만주의 위영상은 자신의 일생이 생면부지의 쏘련 조종사와 밀접하게 련결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조종사가 바로 그레고리 쿠리센코이다.

■쿠리센코


쿠리센코는 1903년에 태여났으며 쏘련공군의 비행대대장이였다. 1939년, 그와 전우는 쏘련 정부의 파견을 받고 폭격기대대를 인솔하여 중국에 와 중국인민항일전쟁을 원조했으며 중국인민과 어깨겯고 싸웠다.

1939년 10월, 쿠리센코는 중국항공지원대 폭격기대대를 인솔하여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한구공항을 기습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안겼다. 귀항 도중 쿠리센코가 조종하던 비행기가 적의 요격을 받아 한쪽 엔진이 멈췄고 그는 가슴과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만현(지금의 중경 만주구) 상공으로 날아갔을 때 전투기 동체가 균형을 잃자 지면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쿠리센코는 락하산을 포기하고 만현 진가패지구 장강 강면에 불시착하기로 했다.

불시착에 성공하여 2명의 전우는 강안으로 헤염쳐 올라갔으나 부상당한 쿠리센코는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강안으로 헤염쳐 갈 힘이 없어 강물에 휩쓸려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그때 나이는 36세였다. 20일 뒤, 쿠리센코의 시신이 수습되였으며 현지 대중들은 그를 위해 추모회와 장례식을 거행했다.

쿠리센코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나는 내 조국의 재난을 체험하듯이 중국인민의 재난을 체험했다. 일본군이 중국땅을 무차별 폭격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매우 분노하고 괴로웠다.”

중국인민은 이 영웅을 잊지 않았다.

1958년, 만현인민정부는 쿠리센코를 위해 서산공원에 렬사릉원을 건설했다. 그해 4살이였던 위영상은 이 영웅이 틀림없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위영상의 외할아버지 집은 장강변에 있었는데 당년에 적지 않은 대중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쿠리센코의 시신 수습에 참여했다.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쿠리센코는 중국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해에 위영상의 어머니 담충혜는 쿠리센코의 묘지기가 되였다. 당시 31살이였던 담충혜는 서산공원에서 록화사업에 종사했는데 쿠리센코에 대한 경앙심으로 그녀는 묘지기를 자원해 묘원 청소를 하고 묘비를 닦으며 잡초를 정리했다.

1977년, 어머니가 퇴직하기 전 묘지기 임무를 아들 위영상에게 맡기려 했다. 젊은 위영상은 묘지기가 무미건조하고 평범하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그에게 평범한 일은 더욱 견지해야 한다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 외국영웅의 집은 중경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있다. 이곳에는 영웅의 가족이 한명도 없기에 우리는 그를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 후 쿠리센코 묘지기는 위영상의 한평생 가장 영광스러운 사업으로 되였다. 여러 단위와 기업들에서 높은 로임으로 그를 데려가려 했지만 위영상은 모두 거절했다.

2014년 퇴직 후에도 그는 매일이다싶이 묘원에 가 옛 친구를 방문하듯 묘원을 살핀다. 그는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며 이것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퇴직 후 매일 아침 묘원에 와야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2018년, 91세의 담충혜는 림종 전에도 아들에게 묘원을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수십년 동안, 이들 모자의 수호 속에서 쿠리센코 렬사 묘원은 중국인민의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영웅의 사적은 대대손손으로 전승되고 있다.

당시 어머니가 쿠리센코를 위해 직접 심은 나무는 지금 하늘을 찌를 듯한 큰 나무로 자랐다. 위영상은 살아있는 동안 묘원을 잘 지킬 것이라며 이것은 책임이고 감사하는 마음이며 중국인으로서의 량심이라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주문충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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