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락타’로 불리운 충성스러운 전사 황문걸

2025-07-22 08:38:06

광동성 매주시 흥녕시 대평진 상대당촌에는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청나라 때 지은 집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혁명렬사 황문걸의 생가이다.

얼마 전, 대평중심소학교의 소선대원들이 이곳에서 특별한 수업을 들었다. 수십년의 세월을 지나 혁명선배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황문걸


1902년 10월 6일, 황문걸은 광동성 흥녕현 대평구(현재 광동성 흥녕시 대평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교시절 그는 여러차례 친구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 일본제품을 단속하고 애국사상을 홍보했으며 학교에서는 반제애국 학생운동의 적극적인 활동가였다. 이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황포군관학교에 합격하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군관학교 중공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하고 로씨야어에 능통하여 졸업 후 쏘련의 하바롭스크, 울라지보스또크 일대에 배치되여 당의 사업에 종사했다.

1931년, 황문걸은 귀국하여 상해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했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중공상해 림시중앙국 대리서기, 서기, 중공중앙 장강국 조직부 부부장, 비서장, 중공중앙 남방국 지도부 성원 등을 력임하고 당의 조직사업을 수행하고 중국공산당 지방조직을 복원 및 건설하며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38년 10월 12일, 일본군이 혜양 대아만에 상륙하자 국민당 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고 다음날 혜주가 함락되여 광주의 상황이 위급해졌다. 남방국은 황문걸을 광주로 파견하여 광동성당위가 이 사변에 대응하도록 지도했다. 황문걸은 즉시 결단을 내려 긴급조치를 취하고 성당위 기관과 팔로군광주판사처는 광동 북부로 이전하고 광주시위는 조직부장 륙신을 남겨 일부 당원을 거느리고 지하투쟁을 견지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그는 밤낮으로 바삐 보냈으며 일본군이 광주를 점령하기 직전에야 철수했다.

오래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동분서주하며 헌신적으로 일한 황문걸 1938년 겨울 자신이 폐병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정기간 치료를 받은 후 병세가 막 호전되자 그는 주은래가 포치한 임무를 결연히 접수하고 긴 로정을 통해 중경에 도착하여 남방국에서 당의 조직사업을 책임지며 항일전쟁의 수요에 적응했다.

그 기간 그는 당의 조직건설과 사상건설을 열심히 추진하여 중경에서 당원 훈련반을 주관하고 엽검영의 남악유격간부 훈련반에 참여하여 엽검영 등 사람들이 강의할 수 있도록 많은 쏘련 문장을 번역했다. 그는 또한 정론 문장을 작성하고 《정당을 론함》이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현운’, ‘란광’등의 필명으로 《대중》, 《해방》, 《신화일보》 등 신문, 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하여 중공의 항일구국 강령과 항일민족 통일전선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39년 상반기까지 남방국이 이끄는 각 지역의 당조직 건설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당원수는 8만명을 넘었다.

황문걸은 당의 사업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병에 걸린 것은 안해도 알지 못했다. 1939년 7월, 일본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면서 그는 방공호에서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났고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해 8월에 불행히도 향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문걸이 세상을 떠난 뒤 팔로군중경판차서의 전체 동지들은 이에 애도를 표했고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 동지들은 직접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우리 당의 락타로서 그가 맡은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으며 임무를 짊어지고 어려운 사막을 멀리까지 헤쳐나갔다. 이 같은 사람이 혁명이 어려운 시대에 사망하는 것은 정말로 혁명의 손실이다.” 엽검영은 <황문걸 동지의 죽음을 애도하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1983년, 민정부는 황문걸을 혁명렬사로 비준했다. 2020년 9월, 황문걸은 제3진 저명한 항일영렬,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되였다.

황문걸의 고향에서 그의 사적은 깊이 기억되고 있다. 2021년 6월, 현지에서는 황문걸 생가를 보수하고 생가를 기반으로 ‘황문걸 렬사 사적 전시전’를 마련하여 황문걸의 조각상, 주제 조각벽, 문자벽 및 관련 실물 등을 배치했다.

매주 흥녕 대평진당위 선전위원인 황개파는 황문걸의 생가는 이미 현지 혁명전통교양, 애국주의교양의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며 “우리는 계속하여 영렬의 혁명사적을 발굴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황문걸의 충성스럽고 사심 없는 혁명정신을 료해하며 홍색유전자를 전승하고 당의 우수한 전통을 고양할 것이다.”고 밝혔다.

  신화사 기자 등서선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Copyright © 200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