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장, “맹세코 적들과 결사전 하자!”

2025-07-30 08:55:02

천진시 계주구 찬령묘 렬사릉원은 초목이 울창하고 렬사 묘비가 엄숙히 서있으며 추모하러 온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표정은 엄숙하다. 이곳에는 찬령묘 돌파전에서 희생된 102명의 렬사가 잠들어있으며 중공 기열변특위 제1지역 전원공서 전원인 양대장이 그 속에 포함되여있다.

양대장.


양대장의 본명은 양사영, 일명 장체로 1909년 천진시에서 태여났다. 1923년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여 재학중 진보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31년 9.18사변 이후, 당이 지도하는 항일구국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같은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그는 산해관─천진─정주 구간으로 조동하여 철도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고 이 기회를 통해 철도구간의 항일구국회 사업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이끌었다.

로구교사변 후 천진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준엄해졌다. 양대장은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천진, 당산 등지에 항일구국 소조를 설립하고 항일 선전 소책자 등을 발행하여 철도 청년종업원들을 대상으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교양을 진행했다.

1939년 4월, 양대장과 그의 안해 염국진(중공당원, 가명 염지)은 평서항일근거지로 일하러 갔고 같은 해 7월에는 진찰기 제6전원공서(평서전원공서) 민정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1940년, 양대장은 평서전원공서 비서 주임을 겸임했고 곧 창완현 현장으로 전임되였다.

평서는 우리 당이 진찰기 지역에 설립한 가장 초기의 항일근거지중 하나이다. 일본군은 1940년부터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했다. 창완은 로구교가 위치한 곳으로 적군은 이곳에서 잔혹한 ‘3광’ 정책을 시행했다. 극도로 렬악한 환경 속에서 양대장은 모두에게 이를 악물고 버티라고 격려하며 전 현 인민을 이끌고 백화산과 영정하 강변에서 용감하게 투쟁했다.

1943년, 하북성 동부의 정세가 호전되여 전에 적에게 잠식되였던 기본지역이 대부분 회복되고 넓은 새로운 지역이 개척되였다. 새로운 투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1943년 7월, 기열변특위가 설립되였고 산하에 5개의 지구위원회와 5개의 전원공서가 설치되였으며 양대장은 제1지역 전원공서 전원으로 임명되였다.

제1지역 전원공서 아래 기열변 서부의 4개 련합현에서 양대장은 취임 후 선후하여 기관 생활, 사업과 학습 제도를 세우고 회보, 청시 및 순시 등 규정을 명확히 했으며 변연지대 정부가 발표한 각종 정책과 법령을 발행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근거지 정권 건설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마련했다. 전원공서에서는 촌정권 개조에 관한 지시 서한을 발송하여 기존의 촌정권에서 나쁜 세력을 단호히 제거하여 촌간부들의 순수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44년 5월 16일, 지방 당조직을 신속히 정비하고 지방 정권 건설을 강화하기 위해 양대장과 제13단 부정위 료봉, 계준흥련합현 현위 서기 계안은 구와 현 간부 등 200여명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 회의를 열었다. 회의 장소인 단산자는 적군의 하영 거점에서 멀지 않았고 적의 간첩 활동이 기승을 부릴 때라 회의 소식이 곧 적에게 전해졌다. 17일 오전 10시경, 적군이 단산자를 공격하자 양대장은 신속하게 철수했다. 18일 새벽, 부대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양대장은 한편으로는 중요한 문서를 불태우도록 조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위대원들을 조직하여 현, 구 간부들을 엄호하며 남쪽으로 포위를 뚫었다.

지휘관과 대원들은 적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돌격하여 길을 뚫었고 일부 간부들은 신속하게 포위를 돌파했다. 하지만 적들은 재빨리 다시 봉쇄했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양대장은 팔을 휘두르면서 웨쳤다. “맹세코 적들과 결사전 하자!” 전투는 새벽부터 거의 정오까지 계속되였고 대원들은 총알이 다 떨어지자 돌로 적들을 내리쳤다. 전투중 양대장은 불행히도 총에 맞아 향년 35세 나이로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전투가 끝난 후, 현지 항일 간부와 대중들은 산언덕을 누비며 양대장 등 렬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찬령묘 서남쪽 산비탈에 묻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리유로 양대장과 렬사 잠중의 신분만 확인되였다. 1957년, 찬령묘 렬사묘지가 완공되여 양대장, 잠중 및 100명 무명렬사의 시신이 묘지에 안장되였다. 전투가 발생한 이후 80여년 동안, 근처의 마을 주민들은 이 무명렬사 묘지를 묵묵히 지켜왔다.

2021년, 천진시 계주구 하영진은 찬령묘 렬사릉원과 5킬로메터 떨어진 청산령촌 천진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전비대 옛터 2개의 홍색명소를 유기적으로 련결하여 홍색문화 회랑을 건설하였고 하영진의 당원, 간부들이 해설 임무를 맡아 의무적으로 릉원을 지키는 사람이 되였다.

올해 26세인 하영진 간부 리기도 입사 후 “장병들은 선혈로 충성을 다졌고 용감하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뉴미디어 전파 등을 통해 102명 렬사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윤사원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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