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돌바위가 우뚝 솟은 달라자산에 둘러싸여있다.
안도현 명월진 달라자촌은 46세대, 81명의 상주인원이 생활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돌바위들이 우뚝 솟은 달라자산에 둘러싸여있어 천연요새 같은 느낌이다. 항일전쟁시기, 이곳은 지혜와 신념이 응축된 은밀한 혁명장소였다. 동만지역의 항일투쟁에 중요한 지도와 지원을 제공한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가 바로 이곳에서 소집되였다. 90여년이 지난 현재, 회의가 소집되였던 민가는 찾아볼 수 없게 되였지만 촌민위원회 건물에 건설된 홍색전시관에서 그 시기의 력사를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 홍색전시관은 촌민위원회 건물 안에 건설되여있다.
달라자촌 홍색전시관의 첫인상은 소박함이였다. 원래 크지 않은 촌민위원회 건물의 일부 공간을 개조해 만들다 보니 전시 면적은 작았지만 내용은 알찼다. 웅장함 대신 마을이 간직한 홍색력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촌당지부와 촌민위원회의 노력이 느껴졌다.
이곳을 찾은 날 달라자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인 최덕강이 관련 력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기관단체에서 방문할 때에는 진정부의 전문 해설원을 대동하여 오는 경우가 있지만 평소에도 대외에 개방하다 보니 개인이나 기타 단체들이 방문할 때에는 촌지도부 성원들이 직접 해설에 나서기도 한다고 했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 홍색전시관 내부모습.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는 동만지역의 힘이 비교적 약했던 상황에서 당이 주동적으로 항일구국의 력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외부 침략에 저항하고 무력으로 고향땅을 수호하자고 호소했던 중요한 회의입니다.” 최덕강 서기가 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회의가 소집된 배경과 회의의 주요내용들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9.18 사변’ 직후,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는 잇달아 반일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동북3성을 무력으로 침입한 목적이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시도임을 폭로하고 중국공산당이 여러 민족 인민을 이끌고 외부 침략에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중국에서 몰아내려는 결심을 보여주었다. 이어 중공동만특위에서도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일련의 반일 결의안과 문서를 론의, 발표하고 여러 민족 인민들이 다양한 반일단체를 설립, 확대하고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1931년 11월 중순에 중공만주성위는 동장영을 파견하여 동만지역의 유격대 관련 사업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장영은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기 위하여 1931년 12월 16일, 옹성라자의 한 민가에서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를 소집하게 되였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 홍색전시관 내부모습.
옹성라자를 회의장소로 선택한 데에는 3가지 리유가 있었다. 우선 이곳은 연길, 화룡, 훈춘과 련결되여있는 등 지리적 조건이 좋아 회의 참가자들의 통행안전을 보장하기에 편리했고 또 당조직이 상대적으로 견고하여 회의를 비밀리에 진행하기에 유리했으며 대중적 기반이 좋고 반일투쟁 분위기가 짙어 위험에 처할 경우 여러 민족 인민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 회의에는 동만 각 현의 공산당, 공청단 책임자 40여명이 참가했는데 달라자촌의 홍색전시관의 전시벽에서 일부 동지들의 사진과 초상화를 찾아볼 수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중 23명의 자료가 기록에 남아있었습니다. 그중에는 한족, 조선족 등 여러 민족이 포함되여있는데 사진이나 초상화 자료가 있는 사람은 7명 뿐이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남긴 개인 자료는 매우 적지만 그들의 혁명정신은 영원히 남아 세세손손 후대들을 교양하고 있지요.” 최덕강 서기가 전시벽에 걸린 사진과 초상화가 몇장밖에 안되는 리유를 알려주었다.
달라자촌 민가에 그려진 홍색주제 벽화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는 총 10일간 소집되였다. 회의는 대중 기반이 좋고 적의 지배력이 약한 지역을 선택해 유격대를 창설하고 항일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 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무장을 구축하고 동만지역의 항일유격대를 창설하는 등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론의를 펼쳤다. 광범위한 학습과 대화를 통해 회의 참가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사상을 통일하고 투쟁 방향을 명확히 하게 되였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가 끝난 후 동만의 각 현은 잇달아 유격대를 설립하였고 1932년 겨울부터 1933년 봄까지 ‘반토벌’ 투쟁을 이어오면서 비교적 빠르게 발전하여 점차 동만지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강하고 기술적으로 가장 뛰여난’ 항일무장 세력으로 되였다.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의 개최는 동북인민혁명군독립사, 동북인민혁명군제2군, 동북항일련군제2군, 동북항일련군 제1군을 설립, 개편하는 데, 동만에서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데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 유적지’ 돌비석.
이곳의 항일전쟁 력사에 대해 체계적으로 료해하고 나서 촌서기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면서 홍색 요소들을 더 찾아보았다. 촌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유소가 있었는데 주유소 바로 앞에 ‘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 유적지’ 기념비가 있었고 그 그념비의 맞은켠, 달라자산 바로 아래에서 ‘중공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지’ 기념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수십년간 도로건설 등 촌 주변의 기반시설 건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구체적인 회의 장소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중공동만특위 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지’ 기념비
마을 안에는 홍색전시관외에도 특색문화장랑, 홍색벽화, 본보기전시관, 홍색주제 산책로 등이 건설되여있어 짙은 홍색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최덕강 서기는 “2019년 동만특위옹성라자공산당공청단회의전시관을 개방한 이래 년평균 8000여명의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습니다.”면서 “홍색교양의 질과 효과를 더한층 높이려는 데 취지를 두고 교양기지의 규모를 확대하고 봉사 면을 넓히는 등 발전 경로를 꾸준히 론의, 검토하고 있습니다.”고 밝혔다.
달라자촌은 혁신적인 실천을 통해 무형의 홍색력사가 유형의 홍색전시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력사는 정신적 ‘좌표’가 되여 후대들을 교양, 격려하고 있다.
글·사진 전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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