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충혼 다진 항일영웅 고영상

2025-08-05 08:58:20

감숙성 평량시 령태현 왕가장촌 광장에는 반신상 하나가 조용히 서있다. 단호한 눈빛과 당당한 기상을 지닌 이 인물은 바로 현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고영상이다. 혁명에 충성하고 고향과 나라를 지킨 그의 사적은 지금까지도 고향사람들에게 칭송되고 있다.

고영상의 본명은 고창귀이며 1912년에 태여났다. 감숙성 령태 출신으로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활해왔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령리하며 강직한 성품에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1931년 봄, 고영상은 국민당 제26로군을 따라 강서의 ‘공산당 토벌’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 기간 그는 홍군의 규률이 엄격하고 국민당 군대가 백성을 탄압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의 사상은 크게 변화했다.

같은 해 12월, 고영상은 녕두봉기에 참가하여 홍군에 가입했고 홍군 제5군단 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그는 중앙쏘베트구역을 보위하기 위해 네번째와 다섯번째 ‘포위토벌’ 반격전에 참가했으며 용감한 전공으로 선후하여 영장, 퇀장으로 승진했다.

고영상은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서 공부한 후 산서 태원에 가 항일유격 골간 훈련을 받았다. 그 기간 그는 적극적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항일무장대오를 확대하고 당조직을 설립했다. ‘진서사변’에서 염석산의 대규모 포위공격에 고영상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침착하게 부대를 이끌고 포위를 뚫고 산서 서북으로 이동하여 당과 인민을 위해 얕볼 수 없는 항일무장 력량을 보존했다.

1940년 2월, 일본군 다카하시대대는 산서성 오채현 대거회촌에서 우리군의 1개 기병련을 포위했고 제36퇀은 명령을 받고 급히 지원했다. 고영상은 36퇀 2영을 지휘하여 완강하게 전투를 벌렸고 적의 3차례 공격을 련속 물리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영상은 항전승리를 직접 보지 못했다. 1945년 7월, 고영상은 제36퇀과 민병을 이끌고 산서성 신지현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전투에서 적군이 조직한 집단이 고영상이 있는 지휘소를 향해 돌진하자 고영상은 기관간부와 경호원을 이끌고 적들과 백병전을 벌렸다. 격전중에 그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과다출혈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고영상의 추도대회에서 진수군구 2분구 사령관 허광달은 고영상의 생애를 높이 평가했다. 그가 인민을 위해 기여한 탁월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오채현 횡산촌을 영상촌으로, 횡산을 영상산으로 개명했다.

중국공산당 령태사무위원회 기념관의 고영상 특별 전시청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꽃바구니가 고영상 사진 옆에 놓여있다. 기념관 사업일군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많으며 청명절에는 꽃들이 전시청을 가득 채운다고 소개했다.

전승의 불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홍색정신을 보다 잘 발양하기 위해 현지 학교는 경상적으로 중소학교 학생들을 조직하여 기념관을 참관, 학습하도록 하며 고영상의 사적과 그 간고했던 투쟁시절을 료해하게 했다. 많은 학생들이 고영상 전시청의 ‘붉은넥타이 자원봉사자’가 될 것을 주동적으로 신청하기도 한다.

기념관 부관장 백쌍굉은 “고영상은 혁명사업에 충성했다. 그의 용감한 사적은 령태의 대대손손들이 홍색혈맥을 이어받고 애국심을 가지며 사회책임감을 양성하도록 격려한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조혜림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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