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히 항일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팽사량

2025-08-07 08:37:13

뜨거운 해빛이 내리쬐는 호남성 상덕시 석문현 신관진 안락편구의 한 절벽에 씌여진 ‘암문구’라는 세 글자가 매우 눈에 띄이는데 이곳은 항일영웅 팽사량이 희생된 곳이다. 절벽 아래에는 팽사량 장군의 기념비가 꽃다발에 둘러싸여 장엄하고 숙연하게 서있다. 기념비 초석에 새겨진 <전 사 장병들에게 보내는 글>은 그가 석문현성을 지키던 당시의 “나와 전체 장병들은 진지와 생사를 함께할 결심을 다지고 왜적을 섬멸하여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언장담을 기록하고 있다.

■ 팽사량


팽사량은 1904년생으로 호남성 류양현(지금의 류양시)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 륙군대학 제11기 졸업생이다. 팽사량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깊은 애국주의 지조를 키웠다. 륙군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선후하여 대아장전역, 무한회전, 장사회전에 참가했다. 1942년, 팽사량은 제73군 림시편성 제5사 소장, 부사장으로 임명되였고 뒤이어 사장으로 승진했으며 상덕회전에서 희생된 첫 장군이였다.

1943년 11월 2일, 일본군이 상덕과 도원 일선의 중국 군대를 공격하면서 상덕회전이 시작되였다. 팽사량 장군은 부대를 거느리고 상덕 서북 전초기지인 석문에 방어시설을 구축했으며 일본군과 끝까지 혈전을 벌릴 결심을 다졌다. 11월 6일, 일본군은 2개 사단의 정예부대를 동원해 3갈래로 나누어 석문을 포위했으며 비행기와 중포로 현성을 무차별하게 폭격했다. 팽사량 장군은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적들과 싸웠다. 전투가 가장 치렬했던 대첨산 진지의 최전방에서 그는 “적들이 한발짝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웨쳤다.

11월 14일 아침, 림시편성 제5사는 일본군과 천점포, 쌍계교에서 대전을 벌렸다. 여러차례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 일본군은 국제법 준칙을 위반하고 독가스 작전을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림시편성 제5사의 1개 강화영의 근 1000명의 장병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어 석문현성 북쪽 방어선이 돌파되였고 팽사량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진입한 일본군과 골목전쟁을 벌리며 많은 일본군을 섬멸했다.

증원부대의 도착과 함께 일본군은 14일 당일 총공격을 시작했으며 석문이 긴급상황에 처하게 되였다. 위기상황에서 팽사량 장군은 앞장서서 73군의 철수를 엄호하는 중임을 맡았다. 11월 15일 아침까지 일본군은 여러차례 성을 공격했으나 팽사량 장군과 림시편성 제5사의 장병들에게 격퇴되였다.

73군의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완수한 후 림시편성 제5사는 15일 저녁에 석문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때 일본군은 이미 례수하 맞은편에 진을 치고 있었다. 팽사량 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포위를 돌파하던중, 암문구에서 불행히도 일본군 비행기 기관총에 맞아 장렬히 순국했다.

오늘날 ‘상서 북쪽 관문’으로 불리는 석문현은 이미 호남의 감귤 주요 생산현이자 가금류 사육 대현이 되였다. 신관진에서 현지 정부는 팽사량 장군 기념비와 73군 항일전쟁 희생전사 공동묘지를 핵심으로 애국주의교양기지를 구축했다.

석문현박물관 원 관장인 룡서빈은 여러해 동안 팽사량 장군 등 선렬들의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왔으며 현지 당원, 간부, 중소학교 학생과 대중들에게 선렬들의 사적을 이야기해주었다. 룡서빈은 “오늘날 우리의 행복한 생활은 모두 선렬들의 희생으로 바꾸어온 것이며 그들의 외부의 침략과 압박에 맞서 싸우고 정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반드시 대대로 전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주면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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