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선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위기의 순간에도 책임을 다한 등영요

2025-08-21 08:39:47

“공산주의를 열심히 배우고 사회주의를 창조하는 세계적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호남성 차릉현 레닌학교에는 항일영웅 등영요가 이 학교의 전신인 차릉현립 레닌고급소학교를 위해 작사한 교가를 보존되여있다. 이 노래는 그가 청소년을 위해 작사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리상의 빛을 발하고 있다.

등영요.

1912년 1월 24일, 등영요는 호남성 차릉현 요파향 대남촌(현재 차릉현 요로진 대남촌)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어린시절 서당에서 공부했고 성적이 우수했다. 1930년, 등영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청단상동특위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구, 현 쏘베트정부에서 문서사업을 맡아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책임감 있게 일했고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학적 사로가 민첩하고 말과 글 솜씨가 뛰여나 당내 ‘수재’로 불리웠다. 그는 사람들을 성실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업무에서 지칠 줄 모르는 근성으로 인해 동지들의 깊은 호평을 받았다.

1934년 8월, 등영요는 홍군 6군단과 함께 서쪽으로 출정했다. 홍군 제2, 6군단이 합류한 후 그는 선후하여 홍군 2군단 정치부 총무처장과 홍군 6군단 선전부장으로 전임되였고 이후 홍군 제4방면군으로 조동되였다. 1938년, 등영요는 팔로군 129사 기병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여 400명의 신병을 이끌고 일본군의 40여대의 군용차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등영요의 이름은 기남에 퍼졌다.

1938년 5월, 동진종대 정치부 주임 겸 동진2퇀 정치위원을 맡고 있던 등영요는 2퇀을 이끌고 기남 영년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야외에서 숙영을 하면서도 백성들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고 공정하게 거래했다. 동시에 그는 부대를 이끌고 토비들을 소탕했으며 성 안의 백성들은 길가에 서서 동진종대 제2퇀의 입성을 환영했다. 등영요는 성내 남대묘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고 혁명의 방향과 미래를 제시하며 각계, 각층의 대중들에게 단결하여 항일하도록 호소했다.

또한 그는 중공영년현위와 항일현 정부, 현 민족전쟁전지위원회 구성에 착수했고 현 농민항일구국회, 현 녀성항일구국회 등 항일조직을 잇달아 설립함과 동시에 공상업 발전을 격려하고 시장무역을 회복하며 농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수수를 재배하여 농업생산을 발전시킬 것을 호소하고 기남항일근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39년초, 일본군은 5개 사단을 모아 여러갈래로 나누어 기남항일근거지를 ‘소탕’했다. 등영요는 동종 1지대에 도착하여 부대를 이끌고 기남 오분구의 반‘소탕’에 참가했다.

3월 3일 아침, 무읍현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서툰 일대를 향해 기습을 준비했다. 이때 등영요는 서툰에서 부대를 모아 회의를 하고 있었고 적의 총소리를 들었을 때는 상황이 이미 매우 긴급했다. 그는 과감하게 일부 지휘관과 대원들에게 대중들의 전의를 엄호하도록 명령했고 일부 약 30명의 지휘관과 대원을 직접 이끌고 서툰촌 서쪽으로 달려가 유리한 지세를 선점하고 일본군을 저격하고 매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치렬한 교전중에 그는 머리와 다리에 모두 총상을 입었고 결국 심한 부상과 과다출혈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1940년, 무읍현 군정민 각계는 등영요의 묘 앞에 비석을 세웠고 비문에는 ‘등영요는 강남의 뜻을 지닌 인사이다… 동진종대를 이끌로 무읍에 와 솔선수범하여 용감히 적을 물리치고 수십차례의 전역을 치렀다… 혁명대오는 기둥을 잃었고 적군과의 싸움에서 선봉이 줄었다. 무읍 대중들은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적혀있었다.

등영요의 장렬한 순국은 전국에 충격을 주었다. 1939년 4월 11일, 《신화일보》(화북판)는 <등영요 동지를 기리며>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렬사의 빛나는 공적과 혁명투쟁의 일생을 노래했다. 1940년, 팔로군 제129사 정치부는 《렬사전》을 편찬했으며 류백승은 서문에서 등영요를 ‘위대한 혁명가이며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까지도 등영요의 사적은 형수시박물관의 항전영웅 사적 전자스크린 전시 및 방송에 모두 수록되여있으며 참관객들은 박물관내에서 영웅을 료해하고 기릴 수 있다.

등영요가 일했던 차릉현 레닌학교(원 차릉현립 레닌고급소학교)에서 등영요의 이야기는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차릉현 레닌학교 교장 담탄력은 “등영요 동지가 학교를 위해 쓴 교가는 리상에 대한 고수와 청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사상정치 교양에 융합시켜 아이들이 실천해야 할 책임을 알게 할 것이다. 동시에 홍색연구학습과 자원봉사 활동을 조직하여 학생들이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등영요 정신을 가장 잘 이어가는 것임을 리해하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류방주

来源:延边日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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