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민족영웅 등철매

2025-08-26 08:46:39

“나는 살아서는 초목과 함께 살고 죽어서는 고인과 함께 할 것이다. 나는 죽을지언정 목숨을 아끼지는 않을 것이다.” 료녕성 본계에 위치한 동북항일련군 력사사실 전시관에서 학생들이 펼치는 몰입형 단편극은 관람객들에게 항일영웅 등철매가 죽기 전에 했던 굳건한 맹세와 그의 항일 전설을 보여주었다.


등철매는 1892년 10월에 료녕성 본계현 마석욕촌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9.18사변 후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용감하게 나섰다. 민족 독립과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1931년 10월, 등철매는 동북 민중항일구국 자위군을 창설하고 자위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이 소식은 적개심을 가진 료동 민중들에게 있어서 출정의 국가와 다름없었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32년 봄부터 8월까지 등철매가 이끄는 부대는 일본 괴뢰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백여차례 벌려 적을 크게 타격했다. 대오도 크게 발전하여 부대 인수는 1만 5000명 이상에 달했으며 동북항일 무장 세력의 강한 부대가 되였다.

동북항일련군 력사사실 전시관 연구부 주임인 주호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등철매가 이끄는 부대가 오랜 기간 전투를 치르며 휴식을 취하지 못했고 오랜 전투로 인해 등철매도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1934년 5월, 등철매는 중병에 걸려 군대와 함께 할 수 없어 비밀리에 봉성현 소채구 장가보자로 료양을 가게 되였다.

동북항일련군 력사사실 전시관내 전시된 약을 달이는 주전자는 등철매의 마지막 세월을 기록하고 있다. 이 주전자는 등철매가 료양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1934년 5월 30일, 료양중 반역자의 배신으로 등철매는 불행히도 체포되였다.” 주호는 일본 괴뢰군의 위협과 회유에도 등철매가 자신의 의지를 전혀 굽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괴뢰군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지만 그는 단식투쟁을 벌렸고 악비와 문천상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중화인으로 태여나 중화의 귀신으로 죽을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일본 군관이 등철매에게 부채에 글씨를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아낌없이 시를 적어주었다. “오척의 몸이 뭔들 아깝겠는가, 4개 성의 잃어버린 땅을 언제 거두겠는가?”

1934년 9월 28일, 등철매는 일본 괴뢰군에 의해 살해되였고 당시 나이는 42세였다.

항일전쟁 정신이 무엇인가? 그것은 등철매가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 했던 굳은 의지와 일본 괴뢰군에 맞서 싸울 때 병든 몸으로도 료동에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용기이며 불행히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력사는 잊혀지지 않았다. 동북항일련군 력사사실 전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일련군중학교가 있다. 이 중학교는 해마다 항일련군정신 교양을 진행하고 학생들을 조직하여 전시관에 가 현장 수업을 펼치군 한다.

항일련군중학교 공청단 서기인 왕호는 “교과서의 지식은 ‘평면적’이지만 전시관의 학습은 ‘립체적’이다. 학생들이 민족 영렬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침략을 막아낸 이 력사를 기억하고 어렵게 얻은 평화를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조홍남

来源:延边日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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