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천군 장령 리가옥

2025-09-11 08:19:45

사천성 성도시 포강현 대흥진 로평촌에서 한 군인의 반신상이 서있는 데 반신상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다. 조각상 바로 옆에는 항일 명장 리가옥 장군의 진렬실이 있다.

리가옥.


“그때 당시 그는 대부대를 따라 철수할 수 있었지만 의연히 부대를 이끌고 진지를 지키며 아군을 위해 철수시간을 벌었다.” 로평촌당위 부서기인 류문군은 영렬을 추모하러 온 사람들에게 리가옥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감동적인 사적을 이야기해주었다.

리가옥은 1892년 사천성 포강현 대흥장(지금의 대흥진)에서 태여났고 1909년에 사천륙군소학당 제4기에 입학했으며 선후하여 사천륙군군관학당과 남경륙군군관예비학교에서 공부했다.

전 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국민당혁명군 제47군 군장을 맡고 있던 리가옥은 의분에 넘쳐 적들과의 전투에 참여시킬 것을 요청했다.

“사나이가 칼을 들고 사천에서 전쟁터로 나가 놈들을 멸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뼈를 어디에 묻는들 어떠한가, 인간세상 어디나 청산인데.”1937년 9월 리가옥은 사천을 떠나 항일전쟁에 참가하라는 전령을 받고 항일동원대회에서 이 같은 말을 남겼으며 47군 소속 104사, 178사의 약 1만 8000명의 사천군을 거느리고 서창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얇은 옷에 짚신을 신고 먼길을 달려 진동남 항일전선으로 가 일본 괴뢰군의 공세를 막았다.

리가옥이 거느린 사천군은 군 장비가 보잘 것 없었지만 용맹하고 강인하기로 유명했다.

1938년 봄, 장비를 갖춘 일본군 108사단 104려단이 산서 동양관 및 장치성을 침범했다. 리가옥은 사천군을 이끌고 동양관을 3일 밤낮으로 지켰으나 사상자가 너무 많아 동양관을 포기했다. 그 후 일본군은 화력을 집중하여 장치성을 공격했다. 비행기와 대포의 폭격으로 장치 북문이 함락되였다. 장병들은 피와 살로 성안에서 일본군과 이틀 밤낮으로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사천군은 탄약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하는 수 없이 장치성에서 철수했다.

리가옥의 부하였던 황개인은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동양관과 장치성의 2차례 전투에서 사천군은 용맹한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군의 기세를 꺾었고 적과 아군의 사상자는 모두 1000명 이상에 달했다. 일본군은 무기에서 우세를 점했으나 사천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투중에 포격이 계속되였고 산의 초목이 불에 타 재가 되였으며 많은 병사들의 군복은 화염에 휩싸여 너덜너덜해졌다. 장치보위전은 산서 동남쪽 항일전쟁중 가장 비장한 투쟁이라고 불린다.

장치에 머무르는 동안 리가옥 등은 팔로군 한개 포병부대와 함께 방어하며 성을 지켰다. 그 기간에 팔로군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1938년 1월 팔로군 129사 사장 류백승이 장치를 지나게 되자 리가옥은 그를 청해 군관들에게 항일유격전의 중대한 의의와 전략, 전술을 가르치게 했다.

국가의 대의 앞에서 리가옥은 당파의 차별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며 항상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결하여 항일하는 신념을 고수했다.

1944년, 일본군이 14만명의 정예부대를 집결하여 예중회전을 일으켰고 선후하여 정주, 허창, 락양 등지를 점령했다. 리가옥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을 저격하며 40여만명 아군의 철수를 엄호했다. 5월 21일, 섬현 진가파 기간령에서 리가옥과 200여명의 장병들은 일본군에게 매복되였고 치렬한 전쟁에서 리가옥은 여러발의 총을 맞고 향년 52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당시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유품은 필과 피 묻은 옷이였다.” 리가옥의 아들 리극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장면을 떠올렸다. 필을 담은 유리상자 안에는 리가옥이 친필로 쓴 ‘사나이가 나라에 보답하려 한다면 전쟁터에서 죽는 것 또한 좋은 죽음이다.’라는 글구가 있었다. 피 묻은 옷을 담은 상자 안에는 그가 희생할 때의 군복이 걸려있었다. 리극림은 “군복은 이미 피로 물들었고 총구멍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리가옥 장군은 생명으로 애국의 맹세를 실천했으며 기간령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홰불마냥 후대들의 앞길을 비추어줄 것이다.” 매번 리가옥의 사적을 이야기할 때면 류문군의 마음은 존경으로 가득 차넘친다고 한다.

현재 로평촌의 리가옥 장군의 진렬실 내부에는 리가옥의 가문 계복, 서찰 편지 등 사료들이 놓여져있으며 이곳은 이미 청소년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였다.

해마다 5월이면 리가옥의 자녀인 리극림과 리배영은 모두 이곳을 찾아와 아버지를 추모한다. 리배영은 “아버지는 국가 대의를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 침략자와의 싸움에 뛰여들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아버지의 용감한 항전의 영웅적 기개는 우리가 끊임없이 전승하는 가족정신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설신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Copyright © 200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