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로 가꾸어가는 나의 삶□ 류서연

2024-04-12 08:43:20

류달리 굽이 뾰족하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대여섯개의 쇼핑백을 량손에 가득 든 채 뻐스에 오르자마자 뻐스가 사정없이 내달리는 바람에 나는 몹시 휘청거렸다. 아마도 격에 맞지 않게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은 내가 위태로워 보였던지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 쏠리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한 녀자가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쇼핑백을 들고 다니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도 하였다.

그들의 시선에는 나이도 지극히 먹은 녀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제넘는 멋을 부리며 웬 곤혹이냐 하는 조소도 없지 않아 담겨있었다. 하긴 이순을 넘긴 녀자가 무척이나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손잡이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서서 뻐스의 관성에 부대끼고 있으니 그 모습은 승객들에게 안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건 말건 나는 뻐스의 제일 뒤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섰다. 달리는 뻐스에서 내 몸은 흔들흔들 춤을 춘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게 하이힐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내 생활의 또  다른 멋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녀자들에 비해 해발고가 무척 낮다. 그래서 나는 철없는 소녀시절부터 하이힐은 나의 해발고를 높여줄 수 있는 유일한 신발로 추구해왔다. 하이힐이 나의 해발고를 높여주는 유일한 신발로 인연을 맺게 된 후부터 하이힐은 내게 있어서 삶에 멋스러움을 더해주는 아름다운 동반자였고 나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무마해주는 자존심이였다. 하기에 나는 이순의 나이가 넘었어도 여전히 하이힐에 대한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하이힐을 신고 교원의 길을 걸어온 지도 어언 3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난생처음 하이힐을 신으면서 시작된 나의 교원생활은 덕분에 멋스러움으로 시작되였고 화려함으로 그 막을 내렸다.

나는 처음으로 하이힐을 신었을 때의 그 행복한 설렘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스러운 삼척교단에 서게 되던 날 “우리 처녀선생님이 예쁜 하이힐을 신고 아름다운 교단에서 평생 꽃길만 걸어야지.”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그때 당시 류행되던 조선 하이힐을 한컬레 사주셨다. 하이힐은 미색이였는데 굽의 높이는 족히 7~8센치는 되였고 굽의 체격도 날씬하고 송곳처럼 뾰족하였다. 하이힐 앞머리도 동그라니 디자인 되여있어 발이 쏙 들어가면 하얀 발등이 로출되여 무척 예뻤고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오늘부터 너는 멋쟁이 처녀선생님이 되여 교원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네가 키가 작은편이여서 교단에 서려면 하이힐이 제격이지. 너는 하이힐이 너의 작은 키를 높여준 것 만큼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좋은 선생님이 되였으면 좋겠구나. 너를 교원으로 키를 높여준 하이힐의 굽 높이는 바로 우리가 너에게 거는 우수교원이란 기대의 높이이니 절대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해라.”

그때로부터 나는 하이힐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지금까지 하이힐을 나의 맞춤신발로 삼아 30여년 교원의 인생길을 예쁘게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손수 내 발에 하이힐을 신겨주시면서 하시던 말씀 “하이힐의 굽높이는 부모님이 나에게 거는 우수교원이란 기대의 높이”라는 것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나의 교원생애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원만하고도 화려한 종지부를 찍은 것 같다.

하이힐은 아름다운 녀성미를 추구하는 나에게 멋스러움을 가져다주었고 해발고가 낮은 신체상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내 마음을 자신심으로 채워주었으며 교원의 참된 인격을 추구하는 데 동력을 부여해주었다. 하여 나는 지금도 하이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굽이 없는 신을 신으면 바닥에 납작하게 가라앉는 것 같은 초라한 그 느낌이 나를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들었고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였으며 내 자신심을 무너뜨리는 것 같아 죽기보다 더 싫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잊을 수 없다. 갓 작가협회에 가입하였을 때였다. 수필창작위원회에서는 현지답사로 화룡에 가게 되였다. 첫 문학답사라 나는 마치 이름난 작가라도 된 듯 한껏 으시대면서 멋을 내느라 고급원피스에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갔었다.

그런데 웬걸 등산을 한다는 것이였다. 난감하였다. 산은 무척 가파로웠지만 집체활동이라 빠질 수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하이힐을 신은 채 산에 오르자니 그 고생이 여간 만만하지 않았다. 올라갈 때는 그런대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내려올 때는 진짜 죽을 맛이였다.

나는 열 발가락에 내 전신의 힘을 모아 앞으로 쏠리는 몸의 평형을 잡으며 겨우 산에서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고 나니 나의 온몸은 물자루가 되였고 전신의 맥이 탁 풀려 땅바닥에 풀썩 물앉아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하이힐을 벗으니 발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기였고 발뒤축은 껍질이 벗겨져 빨갛게 선홍색 피가 배여있었다. 열 발가락이 너무 아프고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런 발을 보노라니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굳이 고통을 감내해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였던가.

문학이 너무 좋아서 오로지 문학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13년 동안 나는 끓어넘치는 열정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얼기설기 얽힌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문학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그런 문학의 길에서 나는 하이힐을 신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데서 오는 아픔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꾸준히 창작을 견지해왔다. 그러다 보니 150여편의 글을 발표하게 되였고 어쩌다 문학상도 받아보았다. 어느 순간 문학의 길에서 수필창작은 내 삶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하이힐이 되여주어 낮은 키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를 망각하게 해주었고 나에게 자신심을 심어주었으며 긍정적인 삶의 가치를 부여해주었다. 그럴진대 내가 겉으로 보여지는 키에 집착하면서 하이힐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그날 나는 문우들과의 등산에서 수필가의 신분으로 하이힐을 신고 갔다가 엄청 혼났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학교의 교단에서, 번화한 도시의 거리에서, 산책로에서 하이힐을 신고 한껏 멋을 부렸었다. 지금은 내가 하이힐을 신고 걸어온 문학의 길이 내 삶을 충실하고 풍요롭게 채워주고 있고 나의 키를 높여주고 있다.

남은 여생에도 나는 계속 문학에 혼신의 정열을 쏟아붓고 피가 터지고 살갗이 벗겨지고 가시덤불에 발이 찔리고 이슬처럼 피가 내배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창작을 견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수필은 그 매력을 더할 것이고 내 문학은 한결 더 성숙될 것이며 내 문학은 하이힐과 같이 아름다운, 인생의 받침돌이 되여 랑만으로 가득찬 매력을 발산하면서 나의 번뇌와 슬픔과 아픔을 유머와 해학으로 이겨내고 나만의 행복을 수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하이힐을 신어본다. 나이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녀자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하이힐이 제격이다. 문학 또한 나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문학이 내 키를 높여주는 하이힐이 되여주었기에 나는 자신감에 넘쳐 나만의 방식으로 기꺼이 내 생활을 꽃피워 왔고 별처럼 빛을 뿌리는 일상이 모여 내 삶을 한결 찬란하게 장식해주었다.

  하이힐을 포기하지 못하는 녀자, 나에게 있어 문학도 마찬가지이리라. 내 마음에서 피여나는 한줄기 삶의 희열, 그것은 가장 그윽하고 가장 싱그러운 문학의 향기로 피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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