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춤, 시간을 넘어 살아 숨쉬는 예술을 만나다

2024-12-09 08:30:59

“‘춤쟁이’란 꼬리표를 달고 지내온 지가 어쩌다 보니 40년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5일, 장고춤의 제5대 전승인 박성섭(1960년생)은 감개무량해하며 말머리를 뗐다.


박성섭은 1977년에 1년간의 무용 연수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부터 도문시가무단에서 무용수, 안무가로 있다가 1993년에 도문시 향상가두 문화소 소장에 부임하며 대중문예사업에 몸잠근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장고춤 제2대 전승인인 리병수에게서 장고가락을 배우고 제4대 기능보유자인 리복덕, 리정재, 라옥순, 방옥희 등 예인들에게서 장고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장고춤으로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2007년, 그가 이끈 장고춤공연팀이 동북 3성을 대표하여 사천성 성도시에서 열린 세계문형문화유산축제에서 ‘문화유산상’을 받으며 큰 파문을 일으키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족장고춤이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등재된 것이다.

“불혹이란 바쁜 시간을 지나 지천명도 거치고 이순의 나이까지 철없이 훌쩍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장고춤이 늘 함께 있었습니다. 저에게 장고춤은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 아닌 삶의 이야기를 담은 예술이였습니다.”

지금도 박성섭은 장고춤을 빌어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루루 40여년, 그 세월의 중심에서 “장고춤은 큰 기쁨과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켜준 보석같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춤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장고춤, 그 흥겨운 가락과 절도 있는 춤사위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족장고춤은 단순한 춤을 넘어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정서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재이다.

1997년 향항회귀를 기념하며 두만강아동공원에서 펼쳐진 도문시장고춤예술단의 공연.

중국력사문헌에 기재된 장고의 원류는 북으로서 한자 ‘고(鼓)’로 표기한다. 이 글자에는 부풀어오른다는 뜻이 들어있으며 봄철의 우뢰소리와 같이 만물을 소생케 한다는 뜻도 내포되여있다.

북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한 악기로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어떤 것은 중국 고유의 것이고 어떤 것은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고대 요고(腰鼓)가 바로 외국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북으로서 4세기부터 중국에서 류행했다. 북송시기의 음악가 진양이 쓴 《악서》에 따르면 고대의 요고는 머리가 크고 허리가 가늘게 생겼고 수당시기에 북을 허리에 차고 두 손바닥으로 쳤다고 한다. 송조시기에 이르러 요고는 장고(杖鼓)로 사서에 기재되며 명조시기에도 장고라는 명칭이 의연히 쓰였으나 규격에 따라 장고, 단고 두가지 류형으로 나뉜다. 청조에 이르러 장고는 배고(俳鼓)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청조 말기에 이르러 장고는 중국의 중원지방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요족들이 장고라는 북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데 형태나 연주법에서 고대의 요고와 많이 다르며 또한 우리 조선족의 장고와도 완전히 다르다.

악기 장고의 조선반도 류입에 대한 력사적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국시대에 서역에서 동북아시아로 전래된 세요고, 요고가 그 원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당서》 례악지 11권에서는 ‘고려기’의 악기 19가지를 렬거하였는데 그중에 요고가 있었으니 고려시기에 이미 요고가 사용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 기록에서 고려시기 장고업사(장고를 연주하는 사람)라는 연주자가 존재하였음을 찾아볼 수 있다.

두만강문화관광축제에서 장고춤을 추고 있는 박성섭 전승인(가운데 사람).


조선반도에서 장고춤은 교방(고려시대의 기생학교, 말기에는 기생학교가 있는 지역을 이르기도 했다.)을 통해 전해져왔다. 백제, 신라 시대부터 전해진 예기들의 학습을 관장하는 예능청에서는 장고춤이 주요 과목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일제강점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권번(일제강점기시대 기생들의 활동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았던 일종의 상업조직) 출신의 춤군들이 교방장고라는 이름으로 춤을 춰왔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렇게 교방에서 전해지던 장고춤은 춤군들의 기예와 좀더 다채로운 춤사위와 시대적 요구에 응하면서 설장고가락을 결합시킨 민속적인 형태와 새로운 사조에 따른 신무용 형태로 발전을 보였다.

장고춤의 또 다른 형태는 공동체 농경사회의 주술적인 기원에서 유래된 형태이다. 이는 농악으로부터 발달한 남성장고춤으로 주로 풍물굿이나 농악의 설장고놀이에서 보인다. 설장고 혹은 수장고라고 불리는 이 춤은 다채로운 가락의 변화와 발림을 구사하는 활달하고 기예적인 예술성이 특징이다. 흰색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색갈 입힌 조끼를 덧입기도 했다.

박성섭은 “중국에서의 조선족장고춤은 풍물굿에서의 일종 장고잽이라는 놀이나 합주용 악기의 수준을 말하기보다는, 1930년대의 극장예술 대두시기에 몸의 기본적인 형태미, 조형미를 강조하는 동작 위주의 춤으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 50년대에 들어서서 량상호, 조득현과 같은 전문 예술인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최옥주, 최미선, 리록순, 리승숙, 박용원 등 조선족무용수들에 의해 다시 새롭게 양식이 더해지면서 조선족의 대표적인 춤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초창기에는 독무나 쌍무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5인무로 안무가 짜여졌고 다시 군무 그리고 광장공연 등 창조적인 변형과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하태일과 조득현이 농악무라는 최초의 작품을 무대에 등장시켰다.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인 하태일은 두레농악대의 일원으로서 어려서부터 농악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다. 그 뒤 1936년에 연변지역으로 이주해왔고 50년대에 연변문공단 민간, 민속 무용교원으로 초빙되였으며 연변의 1세대 농악 후대를 양성했는데 당시 연변문공단 예술감독이였던 조득현과 손잡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무대에서의 예술화한 농악무를 내놓았다. 이때 장고춤은 녀성들의 섬세한 형태미를 자랑하는 단독적인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1954년 연변가무단의 민속무용예술표현가 량상호는 민간예술인 최자일에게서 장고놀이를 전수받아 중국에서 처음으로 녀성군무 <장고춤>을 창작해 무대에 올렸고 3년 뒤에 조득현이 창작한 장고춤 독무를 무용수 리록순이 무대에 올렸다.

70년대에는 최옥주, 최미선, 리록순 등 무용예술가들이 성숙기를 맞았다. 이 세 사람이 호흡을 맞춰 내놓은 작품은 녀성독무 <풍년벌에 울리는 장고소리>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조선족장고춤은 개혁개방을 맞으며 자체의 특징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박용원의 남녀쌍무 <새봄>과 녀성군무 <장고춤>이다.

새 세기를 맞으면서 조선족장고춤은 단순한 정서, 형식, 내용 표현에서 벗어나 다양화, 기능화, 예술화에로 발전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 연변가무단에서 창작한 녀성군무 <장고춤>과 남성군무 <얼씨구>,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창작한 녀성군무 <장고락> 등이다.

연변대학예술학원 황선자 선생은 “조선족장고춤의 특징은 기존의 장고춤의 서정적인 표현성을 기반으로 하고 춤동작의 형상성과 작품의 내용성 및 예술적인 기교 표현 수단에서는 락천적인 민속춤의 성격 특징을 가미하여 오직 조선족장고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을 정립했습니다.”라고 밝혔다.

박성섭은 1994년에 향상가두 장고춤무용대를 조직해 크고 작은 무대를 이어오다 2010년에는 무용대를 ‘두만강장고춤예술단’으로 이름을 올리고 장고춤의 저변 확대에 힘써왔다. 지금 두만강장고춤예술단은 120여명의 단원을 두고 있으며 주내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박성섭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 조선족장고춤은 단순한 춤을 넘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였습니다.”라고 털어놓는다.

1998년에 길림성문화청은 도문시 향상가두를 ‘장고춤의 고향’으로 명명했고 2008년 문화부는 도문시 향상가두를 ‘중국 장고춤의 고향’으로 선정했다.

“장고춤은 우리에게 흥과 감동을 선사해왔습니다. 우리 조선족장고춤은 민족의 삶의 방식을 담고 있어 친근하고 아름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고춤을 배우고 공연하며 그 가치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장고춤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우리의 장고춤 현장을 지켜온 원로 무용가들이 있지만 로후시기의 활동에서는 개인별로 차이가 극명하게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아직도 현역에서 계속 춤의 열정을 발산하는 박성섭의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박성섭의 뒤를 이어 제6대 대표 기능보유자로 등재된 무용수는 도문시문화관의 김향란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장고춤도 변화하고 있다.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새로운 형태의 장고춤도 등장하고 있다.

올가을에 있은 연변대학 예술축제에서도 요즘 대학생들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장고춤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 지역이 관광도시로 떠오르면서 우리만의 전통춤이 려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주로 무대에서 정형화된 형식으로 공연되던 장고춤이 이제는 플래시몹,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되기도 하면서 장고춤은 더욱 생동감 있고 대중적인 예술로 변모하고 있다.

김향란은 “과거에는 주로 전통음악에 맞춰 추던 장고춤이 이제는 다양한 쟝르의 음악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현대음악과의 결합을 통해 장고춤이 더욱 대중적인 매력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장고춤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해석을 더해주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고 전했다.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의 불씨를 지켜온 이들의 열정은 우리의 문화재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새로운 시대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신연희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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